영화 ‘까미유 끌로델’을 DVD로 보았다. 너무 슬펐다. 조각에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난 까미유 끌로델. 위대한 조각가인 로뎅의 그늘에 가려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고 급기야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영화에 대한 소감을 쓰자면 시간이 필요하겠다.
다만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은 조각에 몰입하는 모습.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기에 쉽게 공감을 했다. 위대한 천재가 아니라도 뭔가를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건 엄청난 예술적 성취감을 준다.
내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 주걱. 그러니까 96년 봄, 처음 산골에 내려와 만들었던 것이다. 10년이 지난 거지만 볼수록 애정이 간다. 보기 위해 만든 조각이 아니라 삶 자체에 쓰임새를 위해 만든 주걱.
당시에 엄청 나게 몰입하면서 만들었다. 대안학교를 만든답시고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거의 날마다 회의를 하곤 했다. 그만큼 앞날이 불안했고, 불투명했다.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는 데는 몰입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돈을 제대로 못 버니, 한 푼이라도 돈을 덜 쓰자는 마음도 있었다. 농장 둘레에 흔한 나무가 오동나무였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자르다가 오동나무가 쓰임새가 많다는 걸 알았다. 첫 시작은 냄비 받침대. 오동나무는 속이 비어있기에 톱으로 얇게 자르기만 하면 받침대가 되었다. 이 당시 만든 받침대를 아직도 쓰고 있다. 이걸로 선물도 많이 했다. 선물용은 사포로 문지르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나무가 아까워 주걱도 만들어보자 했다. 주걱은 쉽지가 않았다. 도끼로 반을 가르고 이를 다시 얇게 조각칼로 다듬는 과정. 이렇게 하다보니 곧잘 밤 12시를 넘기곤 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꽤 오래도록 했다. 차츰 주걱다운 주걱이 되었다. 잘 된 거에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 당시 내게 화두는 ‘늘’이었다. 그리고는 뒷면에는 완성한 날짜를 새겨 넣었다.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밥주걱에서 볶는 주걱까지. 볶는 주걱도 두 종류, 하나는 참깨 같은 걸 볶는 중간치, 또 하나는 가마솥에 쓰는 긴 주걱. 이 가운데 10년이 지나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건 사진에서 보듯 중간치 주걱.
손때가 묻고 수세미로 여러 번 닦다보니 반질반질하다. 불에 누른 자국이랑 나이테가 점점 ‘세월의 색’을 더하는 것 같다. 이 주걱을 볼 때면 그 당시가 떠오른다. 현대인들이 갖는 대부분의 불안감은 자기 분열이라 믿는다. 자신보다 남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하는 분열. 남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우울하고 불안하다. 까미유 끌로델 역시 자신의 예술성을 세상이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나는 주걱을 조각하면서 자기 분열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몰입하는 과정이 즐거웠고, 몰입한 결과가 삶을 윤택하게 했다. 또한 내 손이 갖는 가능성 하나를 되찾는 치유의 기쁨도 맛보았다. 진정한 조각이란 삶을 조각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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