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노래 그림 중독, 삶의 예술

그림과 오르가슴

모두 빛 2007. 12. 6. 08:18

 

 

오랜만에 다시 그림을 그린다. 해외연수, 장례, 김장 담그기, 잡지 만들기로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잡지를 인쇄소에 보내고 나서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본다.

 

사실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데는 아이들 영향이 크다. 이번에 명지가 와서 탱이랑 그림 그리는 걸 곁에서 많이 보았다.

 

둘이서 깔깔대며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보기 좋던지. 이를 테면 친구 누구를 그린다면 그 아이 분위기에 대해 수다를 뜬다. 

“명지야, 너는 어떻게 그려줄까?”

“음, 나는 피에로, 하하”

“음, 광대스타일, 하하하”

 

그림을 스케치 하고, 하다가 잘 안 되면 다시 지우고, 고친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배경색이랑 여러 가지 액세서리를 배치한다. 이렇게 하면서 그림을 그린 아이들이 얼추 일곱 정도나 된다. 열흘 동안 쉴 사이 없이 깔깔대며 그려나간다.

 

처음 두어 명 정도에서는 이미지가 잘 안 나와 버벅 대더니 그 다음부터는 쉽게 그리면서도 분위기가 살아난다. 살짝 눈만 그려도 누구인지가 드러날 정도. 참 신기하다. 그림이 주는 매력을 넘어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

탱이에게 조언을 구한다.

“아빠가 그림 공부하는 데 조언이 있다면 해줄래? 고호 그림을 따라 그려라든지...”

“조언이라...글쎄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 혼자 있는 시간. 오랜만에 차분히 앉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 무얼 그릴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아무래도 나는 나를 그리고 싶다. 살아오면서 자신에 대해 무지하고 방치하고 때로는 자학했던 나 자신을 되살리고 싶다. 그림이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닌가. 나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내 얼굴, 내 코, 입, 머리...가능하다면 내 마음까지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림을 그리는 첫 시작도 자화상이었지만 다시 그려보고 싶다. 그림을 틈틈이 그린 지 석 달 정도 지났는데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나아졌는가도 궁금했다. 다른 정물화와 달리 인물은 스케치가 틀리면 바로 표가 난다. 전혀 그 사람 같지가 않게 된다. 사람 얼굴 그리기가 무엇보다 어렵지 않은가. 그림을 오래 그린 친구들도 인물화 그리기를 어려워한단다. 그만큼 사람은 신비한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림 실력도 없는 데 남을 그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선 나부터 제대로 그리는 게 순서가 되리라 믿는다.

 

우선 사진을 찍어, 인쇄를 했다. 스케치를 한다. 어렵다. 전혀 분위기가 안 난다. 그 다음도 그렇다. 가만히 보니 전혀 구도를 생각지 않고 눈으로 보이는 대로 대충 그리니 그런가 보다. 비례를 따져가면서 다시 그려보니 조금 낫다. 탱이가 그런다.

“와, 많이 좋아졌어요. 눈과 입술만 좀더 손을 보면 되겠는데요.”

 

어느 부분만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다시 처음부터 그리자니 막막하다. 하루쯤 쉬었다가 다시 도전. 이번에는 지난번에 배운 대로 우선 눈은 대상만 보고 손은 가끔만 도화지를 보면서 연필을 계속 이어가는 방식으로. 머리 한쪽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돌았을 때 만나는 지점이 차이가 많이 난다. 이 정도에서 다시 연필로 비례를 잡아가며 전체 틀을 수정한다. 조금씩 나다워진다.

 

눈을 중심에 둔다면 눈에서 이마, 눈에서 머리, 눈에서 입, 눈에서 턱. 이렇게 위아래도 비례가 필요하지만 눈에서 옆 선, 귀, 머리. 이렇게 옆으로도 비례가 맞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얼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된다. 귀가 눈보다 얼마나 올라가 있는지, 눈이 얼마나 작은지. 하나하나 자세히, 정확히 보아야 한다. 나를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던가. 차츰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 점점 기분이 좋다.

 

가장 어려운 건 눈. 모양대로 그리기도 어렵거니와 분위기를 내자면 눈동자도 그려야하는데 정말 어렵다. 대충 그려본다. 그런대로 되었다.

 

명암도 살리고 싶다. 밝은 곳이 광대뼈. 그 둘레를 살짝 연필로 칠하고 손으로 문지른다. 그리고 또 어디에 명암이 보이나. 여기저기 명암을 넣고, 주름도 넣는다. 점점 오르가슴에 젖어든다. 내가 나다워지는 게 진정한 오르가슴이란 생각이 든다.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애들아, 아빠 그림 좀 봐주라. 어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