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홈스쿨링 3년차(풀꽃처럼 김자원 글 펌)

모두 빛 2007. 9. 30. 12:58

윈래 이 글은 책벌레가 중국에 있을때, 5월쯤 쓴 글입니다.
민들레에서 책벌레에게 원고 청탁을 해서 썼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책에는 안 실렸더라구요.

저는 이 글 읽고, 참 감동 받았습니다.
지난 3년의 세월이 보이네요, 흑흑^^

내 사랑하는 딸, 우리 자원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뇨^^

(5월 이후 이리저리 바빠서, 이제서야 이 글을 올리네요.
언제 부터 올리고 싶었는데..)


*홈스쿨링 3년차..(김자원, 책벌레)


사실 처음 홈스쿨링을 했을 때 내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교복이 싫고, 규칙이 싫고, 선배와 후배 관계가 싫고, 그냥 그런 게 싫었을 뿐이었으니까. 어떤 상처가 있었던 것도, 유일한 내 학교 생활인 초등학교 6년이 괴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기저기서 들은 중학교 생활이 ‘익숙하지 않아서’.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인 내게 익숙한 것은 우리 집이지 중학교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홈스쿨링, 처음 짠 계획표는 정해진 과목 수와 정해진 분량으로 딱딱 정해져 있었다. 사실 그땐 홈스쿨링이란 집에서 공부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학교공부를 하고 검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랬는데, 갈수록 지쳐갔다. 정해진 시간 동안 공부를 하지만, 머릿속엔 아무것도 안 들어왔다. 왜, 그런 기분 있잖은가? 읽어도 읽히지 않아서 읽고 또 읽고 같은 문장을 다섯 번째 반복하고 있을 때. 아니면 알 거 같긴 한데 책상 앞에서 일어서면 다 까먹어버린 듯한 기분..

슬럼프에 빠졌다가 다시 슬슬 공부를 잡아갈 때면 한 달에 한번씩 있는 학교너머 캠프가 있었고 거길 갔다오면 또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캠프를 갔다 오면 애들하고 전화하고, 메신저도 하고, 싸이도 하고, 일상이 어그러졌다. 눈치를 봤다. 눈치 보면서 전화통을 붙잡고 늘어졌고 눈치봐가면서 컴퓨터를 붙잡았고 심지어 눈치를 보면서 캠프를 갔다.

그냥, 더 이상 의미 없는 공부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단지 검시를 보기 위해 공부를 한다는 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려면 왜 굳이 홈스쿨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녔으면 경쟁해야 되니까, 1등 해야 되니까 더 열심히 공부를 했을 거 아닌가. 이렇게 자유로운 홈스쿨러이면서 공부에 매여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공부라고 꼭 교과서 공부만이, 문제집 공부만이 공부인 건 아닌데.

이렇게 내가 지쳐갈 때 식구들도 함께 지쳐간 건 당연했다. 끊임없이 혼났고 얘기했고 계획표를 바꿨고 공부를 줄였고 공부를 늘였고.. 조금씩 바꾸긴 했지만 결국 그게 그거인 계획표들이었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변화였다. 수학이고 국어고 과학, 사회 모두 다 놓아버렸고 가장 좋아하는 영어만 들이팠다. 영어비디오, 영어일기도 써보고, 영어동화책 번역도 해봤고. 스스로를 풀꽃대학 영문과 학생으로 임명(?)하고 진짜 재밌게, 열심히 했다. 힘들어도 재미있었고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쓴 영어 일기도, 번역한 동화책 권수도 쌓여갔으니까.

내게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변화가 싫어서 홈스쿨링을 했는데 결국 변화했다. 그런데, 그게 나를 스스로 한 단계 발전시켰다. 공부란 게 한가지만이 아님을 알았고 내가 하는 것이 다 공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캠프도 더 이상 눈치볼 것이 아닌, 또 하나의 공부였다. 캠프를 갔다 온 다음에 이러쿵저러쿵 어머니한테 캠프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사람얘기를 하다 보면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사람공부’를 하는 거라고 했다. 전화하고 메신저하고 하는 것도 다 사람공부였고, 캠프 가는 것도 다 사람공부였다. 나를 앞에 앉힌 채 사람공부가 어쩌고 소통의 중요성이 어쩌고 하는 어머니 앞에서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츰 정말로 그 속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정말, 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홈스쿨링 역사상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배움은 ‘소통하는 법’일 것이다. 사실 이걸 배우는 것은 불가피했다. 좁은 집 안에서 학교 가는 사람, 회사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이 넷이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하는데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배기겠는가?

학교도, 회사도 안 다니고 귀농하고 홈스쿨링하면 넷이 많이 얘기할 거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한때는 식구 네 명이서 얼굴 마주하는 자리가 거의 식탁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아침을 10시에 먹고 점심을 3시에 먹으니까 완전한 네 명이 마주하는 건 저녁 식탁 뿐. 그래서 하루에 조금이라도 넷이 얼굴보고 마주앉아 얘기하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서 매우 많은 노력들을 했다. 돌아가면서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서 넷이 조그마한 컴 모니터 앞에 모여 앉아 들여다보고 나중에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기. MBTI. 같이 원불교 경전 공부하기. 한문 공부하기. 인문학 공부.

뭔가 거창한 거 같지만 내 생각엔 아니다. 일단 넷이 모여서 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깔깔거릴 수 있으면 그게 다이고, 그게 전부인 거다.. 식구끼리 모여서 서로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아갈 수 있으면 되지.

양손이는 모일 때마다 자세 불량에 태도 불량, 맨날 투덜거리기만 하지만 엉뚱하고 재치 있다. 우리가 이 법문은 이런 뜻이다, 이 영화는 이런 뜻이다, 왈가왈부 할 때마다 항상 센스 있는 한마디를 툭툭 던져 유쾌상쾌통쾌하게 상황을 마무리짓는다. 어머니는 가끔 (쫌 자주) 진부하고 너무 까탈스럽지만 분위기를 업 시키는 분위기 메이커이다. 없어서는 안될 존재. 어머니가 없으면 같은 집에 살면서 식구끼리 서로 얼굴 마주할 기회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는 무뚝뚝한데다 언제나 썰렁하고 심각하지만 가르치기를 잘 하든 못 하든 누가 뭐래도 우리 한문공부 선생님이시다^0^. 우리가 배울 한문 문장, 예를 들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같은 걸 구해오는, 우리가 뭐 물어볼 때마다 구박을 받으면서 “잠깐만~”한 채로 네이버 한자사전을 띄워놓은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는 나름 귀여운(?) 훈장님.. ㅋㅋ 그리고 나?? 맨날 ‘글쎄..’하면서 좀처럼 말을 하려고는 않고 생각한답시고 뜸만 들이는 답답한, 그치만 나도 필 받으면 양손이 뺨치게 재치 있는 사람이라구~

아무튼 이런 소통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열심히, 정말 열심히 소통했기에 홈스쿨링을 이만큼이나 이끌어온 것 같다. 모든 공부를 다 놓고 풀꽃처럼 대학생으로 입학할 때도 이런 소통이 뒷받침하고 있었고 어머니 친구의 결혼식 때 부탁 받은 축가를 부를 때도 소통이 뒷받침하고 있었다.^0^ (어디 넷이 화음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인가?) 성격이 180도 정반대인 양손이하고 관계도 많이 좋아졌다. 식구사이의 관계가 원만해지다 보니 그 다음 단계로, 바깥 소통에도 눈길을 돌리게 됐다.

사실 초등학교 때 소통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었다. 조그마한 분교로 전학을 와서 어울리려고는 하지 않고 책만 붙들고 있는 아이가 못마땅하게 느껴졌을까? 점점 어려워지는 관계에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점점 더 책 속으로 빠져들어 숨어버렸다. 캠프는 이런 나를 책 밖으로 나오게 했다. 프로그램하고 그냥 노는 것만이 캠프가 아니니까. 일 안하고 내빼려는 아이도 있었고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내뺀 아이 몫을 다 하는 아이가 있었고 좋아하는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고 질투하는 아이가 있었고 일명 바른 생활 어린이도 있었고 분위기를 리드하는 아이도, 거기 끌려가는 아이도,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도, 이런저런 사람이 다 있었다.

이런저런 사람들 모두 다 착하다 나쁘다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을 안하고 내뺀 아이는 자기 입장에서 보면 정당하다. 예를 들어 몸이 약하고 감기가 걸렸는데, 일을 하면 더 힘들어서 다음 날 프로그램을 못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니까 쉬어야 한다는 거다. 내뺀 아이 몫을 다 하는 아이도 따지고 보면 잘한 일이 없다. 결국 자기만 지치고 힘들고 그 아이에게 화가 나겠지만 그 누구도 그 아이 몫을 자기더러 맡으라고 시킨 사람이 없는 것이다.

사실 내뺀 아이 몫을 다 하는 아이는 내 타입이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 갈수록 짜증이 났고 어머니한테 이런 얘기를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내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내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지도 않는데, 정작 힘든 건 난데. 설령 누군가 칭찬을 해줬다고 해도 칭찬을 먹고 살 수 있나? 칭찬 때문에 모든 걸 다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캠프를 다니면서, 소통하면서 어떤 친구가 미웠던 적도 있었고, 어떤 남자애가 좋았던 적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 몇 명 외에는 아무도 눈에 안 들어왔던 적도 있었고, 애들 전부랑 다 친해졌던 때도 있었고, 어느 한 친구의 성격이 너무 부러워서 닮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고 놀러오고 한 달에 한 번씩 캠프하고 이년이 넘도록 부대끼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이렇게 저렇게 천-천히, 나는 변해갔고 그렇게 변해 가는 내가 좋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어쨌든 변해 가는 나는 살아있는 나니까. (그리고 세상에 좋은 쪽 나쁜 쪽이 어딨어?)

그리고 내 홈스쿨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의 ‘아르바이트’를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양손이와 나는 온 집안 청소와 설거지, 쓰레기 비우기 등의 집안 일을 나눠 하고 한 달에 만원씩 받는다. 그리고 그 외에 오미자 일, 복분자 일 등 바깥일을 할 때는 시간당 2,000원에서 2,500원씩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돈으로 캠프를 간다. 지금이야 교통비와 캠프회비는 어머니가 내주지만 (그 외에 군것질이라든가 노는 비용은 물론 우리의 자금으로.) 예전에는 교통비와 캠프회비를 6 대 4로 냈다. 내가 60%, 어머니 아버지는 40%. 돈이 없으면 빚이 됐고 역시 또 농사일을 해서 갚았다.

왜 6 대 4 제도에서 어머니가 100% 대주는 제도로 바꾸었느냐고? 돈 버는 건 배웠지만 돈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였다. 심각한 구두쇠가 되어 버린 것이다-_-. 캠프 가서 돈이 아까워 최대한 참고 또 참고 거의 해본 일이 없는 군것질.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절대 사질 않는..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많이 나아졌다. 과자를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선물 사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한다. 옷도 많이 사봤다. 잘못 산 것도, 잘 산 것도 있다, 물론.

그리고 이제, 나는 돈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왜냐면 돈 버는 건 어려우니까. 땡볕에서 일하다가 잠시 일어날 때면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아침과 점심 사이 새참, 점심과 저녁 사이 새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나는 돈을 우습게 본다. 왜냐면 돈 버는 건 쉬우니까. 열심히 일하면 된다!! 돈 버는 게 두렵지 않고 돈 쓰는 것도 두렵지 않다.

어쨌든,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고 캠프 가고 돈 쓰고.. 4개월이 지났고 나는 풀꽃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검시가 두어 달 뒤로 성큼 다가와 나를 위협했다. 과학 사회야 암기과목이니까 상관없었지만, 국어는 원래 어느 정도는 자신 있었고 영어야 4개월 동안 줄창 끼고 있었던 게 영어인데.. 그런데, 남은 한 가지 수학이란 놈의 포스는 왜 그렇게도 강한지.

결국 마지막으로 택한 수단이 중1, 중2, 중3 수학 같은 거 다 때려치우고 검시문제집으로 공부하는 거였다. 정작 검시 봐보니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_- 어쨌든 크나큰 코를 수학한테 무지무지 아프게 얻어맞으면서 고검보고 나니까, 대검 검시 볼 때는 절-대 수학 놓지 말고 꼬옥- 붙잡고 공부하고 있다가 아프지 않게 시험 치러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요즘 이 결심이 또 흐트러지고 있다! 그래서 이 글 쓰면서 다시 그 결심을 단단히 다지고 있는 중이다. 아자아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수학 계속 공부하고 놓지 않는 것 뿐인데 뭐~

검시를 끝내놓고 나서 너무나 가뿐한 마음으로 일 이년 전부터 계속 들어오던 중국에서의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우리 이모 댁에서 한 두어달 있다 가라고 하는 거였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서 한 두어달 뭐할 껀데?”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그리고, 이모가 하는 영어도 같이 배우기로 했다. 그리고, 이모가 하는 요가도 같이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중국으로 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0< 5월 13일에 왔고 지금이 6월 13일이니까 딱 한달 됐네. 그동안 깍지를 낀 채 오른발 발바닥을 잡을 수 있게 됐고 그렇게 지겹던 중국어가 쫌
재미있어지려고 한다. 듣고 쓰고 읽기만 했지 말해본 적이 없는 영어도 실컷 해보고 있다. 여기서 내 영어 이름은 Tina다.. 내 이름인 ‘자원’을 중국어로 바꾼 내 중국 이름은 쯔위엔 이다. ‘니하오’(안녕하세요)랑 ‘짜이찌엔’(안녕히가세요 혹은 계세요)이랑 ‘씨에씨에’(감사합니다) 세 개는 아주 당당히 할 수 있다.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중국어 선생님,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나는 영어로 얘기한다. 중국어 선생님이 대학생인데 영문과라나? 중국어 선생님이랑, 영어과외 선생님 크리스랑, 영어 학원 선생님 루크랑 열심히 영어로 이야기하고 집에서도 이모랑 영어로 막 얘기하기도 한다. 루크랑 크리스가 낸 영어로 된 수수께끼도 맞춰보고 영어로 된 tongue twister,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경찰청 철창살은..’ 쯤 되는 것도 연습해서 막 해보고 영어로 농담도 하고 영어로 내 장래희망도 얘기하고 영어로 내 이상형도 얘기하고 영어로.... 아, 물론 여기 와서도 수학은 놓치지 않고 꼭 붙잡고 있음을. ^-^

그리고 이모랑 내 사촌동생, 한국에서 온 이모 친구들이랑 그 엄청난 아들딸들과 같이 베이징 여행을 다녀오면서 어린애한테 지레 겁먹었던 걸 싹- 버리고 왔다. 물론 엄청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게 어린애들인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그게 무섭지는 않다. 처음엔 지원이(사촌동생)가 삐져도 어쩔 줄 모르고 결국은 항상 지원이가 이모한테 혼나고 우는 걸로 마무리되던 것도 “지원아아~ 언니 옆에 앉아 줘, 응? 언니 쓸쓸하잖아.. 손잡아 주라...!” 해서 삐진 걸 풀어주는, 잠시 내게 맡겨진 애들이 엄마 찾아간다는 걸 “얘들아! 너네 가다가 만약 다치고 사고라도 나면 그거 다 언니 책임이잖아. 응? 언니 혼난단 말이야. 살려줘-어!”해서 다시 데리고오는 센스도 생겼다.^0^

그렇게 나는 변해가고 있고, 변해가야 한다. 단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게 좋고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

아!! 또 하나 변한 건, 난 이제 공부가 정말정말 좋다. 세상엔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거든. 물론 영어나 중국어, 수학도 공부지만 사람공부도, 연애공부^^도 있다. 돈 우습게 보지 않는 법, 돈 우습게 보는 법, 혼자 다른 사람 몫의 일까지 다 하고 힘들어하지 않는 법, 어린애를 무서워하지 않는 법,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부들.. 앞으로 하게 될 공부들이 너무너무 기다려진다.^-^

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또 1년, 2년 뒤에 이런 글을 쓰게 되면 어떤 글이 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_<..
 2007-09-28 11: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