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아이들도 보살피는 걸 좋아한다 1 ( 초록마을 38호)

모두 빛 2007. 9. 26. 21:09

 

  우리 집은 어찌하다 보니 고양이랑 같이 산다. 말 그대로 키우는 게 아니라 ‘같이 산다’. 처음 시작은 이랬다. 어느 날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젖먹이 새끼를 데리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으로 찾아든 고양이를 내�을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고양이가 저 알아서 살겠지 하고는 먹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고양이는 우리 식구 눈치를 보면서 집 처마 밑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아궁이 둘레에서, 여름에는 장작더미 위에서. 무슨 새끼든 새끼는 다 귀엽다. 아이들은 새끼고양이를 좋아했다. 밥 먹고 나면 고양이에게 멸치 대가리, 생선가시를 갖다 주면서 고양이 식구랑 금방 친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양이는 우리 집둘레에 터 잡고 사냥을 해 가며, 우리 식구와는 이웃처럼 지낸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처음 왔던 어미 고양이는 어디론가 떠나고, 그 새끼가 다시 어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양이는 우리 식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아이들에게 산교육이 저절로 되는 게 아닌가.


<누군가를 보살피고자 하는 본성>

 

  그 한 가지를 들자면 ‘보살핌’을 꼽을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 보살핌으로 자라지만 보살핌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 아이들도 자신이 받는 만큼 누군가를 보살피고자 한다. 보살핌은 의무 이전에 본성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이를 ‘양육본성’이라 부르고 싶다. 

 

  고양이 덕에 아이들에게 잠자던 양육본성이 활짝 피어났다. 식구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어려 늘 식구들이 보살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은애를 보면 그 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은애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뱄는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그리고 고양이가 새끼를 어디에다가 놓았는지, 그 새끼를 다시 어디로 옮겼는지도 다 안다.

 

  한번은 아이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살려낸 적이 있다. 아이가 마당을 지나가는 데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더란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새끼 고양이가 있는 둘레를 살펴보니 한 마리가 안 보이더란다. 그래서 좀더 찾아보니 새끼 한 마리가 나뭇짐에 눌려 있더란다.

 

  이 놈이 좁은 구멍으로 들어갈 때는 호기심으로 낑낑대며 들어갔다가 나뭇짐이 엉기면서 나올 수가 없었나 보다. 이런 경우, 어미 고양이도 어찌할 수 없겠지. 그리고 보니 그 날 어미 고양이가 나를 아는 체 하는 게 예사롭지가 않았다. 내 곁에 와서 “야옹! 야옹!” 하기에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싶어 쓰다듬어 주려고 하니까, 나를 돌아보며 다시 앞으로 갔다. 그 당시 나는 ‘그 놈 참 이상하네’ 하고는 넘겼는데.......

 

  어미 고양이가 나한테 신호를 해도 내가 못 알아먹은 걸 아이는 새끼들 신음 소리를 듣고 알아낸 셈이다. 새끼가 제 어미에게 도와달라고 보낸 신호인데도 아이는 이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달려가 구해준 거다.

 

  아이들이 이렇게 짐승과 소통하고 또 보살피고자 하는 근거가 뭘까. 호기심만이 아닐 것 같다. 아이가 하는 걸 곁에서 보니 누군가를 보살필 때 오는 기쁨은 큰 거 같다. 아무리 아이지만 자신도 누군가를 보살필 수 있다는 건 뿌듯함을 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보니 아이들이 갖는 양육본성은 자기보다 약한 짐승한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이따금 부모도 보살핀다. 부모가 논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올라와, 어깨가 축 처져있으면 아이가 곧잘 하는 말.

  “어깨 주물러드릴까요?”

 

  고사리 손으로 주물러주는 것도 좋지만 아이 말 한 마디에 이미 그득한 보살핌이 녹아있지 않나. 아이는 자신이 받은 보살핌을 먼 훗날이 아니라 언제든 자신이 필요할 때 되돌려주고 싶어 한다. 


<생명의 빈틈을 채우는 사랑>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어른의 지나친 보살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어른이 대신 해 주려고 하면 이를 거부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데 남이 대신하면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고 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며칠 전 아이 생일날도 그랬다.

 

  이제는 아이가 자기 생일날 스스로 미역국을 끓이는 걸 당연히 생각한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고맙다며...... 아이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몰려온 동네 아이들 역시 비싼 선물 대신에 자신들이 손수 마련해 왔다. 대부분 종이에다가 정성으로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다. 심지어 다섯 살 난 하늘이까지 손수 만든 종이접기를 자랑스럽게 내어놓았다. 그런 선물에 대해 선물을 받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함께 한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요리 한두 가지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상 차리는 곁을 왔다 갔다 하며 무얼 차리는 지를 살핀다. 아내가 밭에 있는 복숭아를 따오라고 하자, 우르르 몰려나가 양손에 하나나 둘씩 따 왔다.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나고 자랑스럽게 해왔다. 이렇게 아이들은 단순히 먹고 놀고 대접받는 생일보다 함께 하는 생일잔치를 더 즐거워한다. 

 

  보살핌이 뭘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본다. 글자 자체를 따져보아도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다. ‘살피다’에서 ‘보’를 더한 게 ‘보살피다’다. 누군가를 보살피자면 먼저 잘 살펴야한다. 충분히 살피지 않은 보살핌은 자칫 간섭이 되기 쉽다. 무엇이 필요한 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 지를 먼저 살펴야 진정으로 보살피는 게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다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을 때 행동으로 나아가는 게 보살핌이 된다.

 

결국 참된 보살핌이란 생명의 빈틈을 채우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