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 사는 선근(12살)이가 부모 따라 우리 집에 왔다. 아이가 티 없이 맑고 예쁘다. 지난해는 모내기 때 왔는데 가고 나서는 한동안 우리집에 다시 오고 싶다 했단다. 그렇게 일년을 기다리다 이번에는 선근이 아버지 휴가에 맞추어 왔다. 선근이 부모님은 오실 때 아나고(바닷장어)회랑 농어회를 잔뜩 싸왔다.
저녁에 아내가 마련한 산나물과 된장국 그리고 손님이 가져온 회로 상차림이 푸짐하다. 먹으려고 밥상에 우르르 달라붙는다. “선근아, 밥 먹자” “먹을 게 없어요”
헉, 이럴 때 나는 슬프다. 아니, 서운하다. 이렇게 먹을 게 많은 데 먹을 게 없다니. 하기는 먼 길을 차만 타고 왔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먹을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꿀꿀하다. ‘지금은 배고프지 않는데요.’ 이게 내가 바라는 답인지도 모르겠다.
선근이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선근이는 생선요리랑 상추를 좋아한단다. 처음부터 아이를 생각하지 못한 건 우리 잘못이겠다. 그 다음날은 아침에 일어나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보니 선근이가 상상이랑 산을 가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어디 가니?” “고사리 꺾으려고요”
둘이서 산을 오르며 수다를 떠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조금 있자 아이들이 다시 내려온다. “고사리가 없어?” “예, 앞산으로 가야겠어요”
다시 앞산으로 올라가는 아이들. 얼마 뒤 아이들은 고사리를 한 봉지 꺾어왔다. 그리고는 아침 밥상. 오늘 아침은 순두부. 선근이는 군소리 없이 순두부 한 그릇을 비운다. 그런데 밥 먹는 속도가 무지 빠르다. 다른 사람들은 밥을 절반도 안 먹었는데 다 먹었다. 선근이 어머니가 변명을 한다. “제가 얼른 먹고 놀고 싶어 그래요”
아침을 먹고 아이들은 책을 좀 보더니 다시 들로 나선다. 이번에는 올챙이를 잡는다고. 점점 날이 뜨거워지자 아이들은 다시 냇가로 간다. 다슬기도 줍고 계곡을 막는 물놀이도 했단다. 그러더니 점심도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리고도 손님이 사온 아이스크림 한 통도 거뜬히 먹어치운다.
예전에 내가 서울 살 때 몸이 무척 안 좋은 적이 있었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어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줄로 짐작을 했다. 인천에서 병원하는 내 친구 정범이를 찾았다. 굳이 이 친구를 찾은 이유는 의사들을 잘 못 믿는 내 버릇 때문이다. 정범이는 친구니까 나한테 솔직히 이야기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친구는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나한테 묻는다. “밥은 잘 먹나?” “응, 잘 먹어” “그래? 밥 잘 먹으면 됐다. 죽을 병 아니다.”
친구 병원을 나서는 데 부끄러웠다. 공부든 일이든 밥 잘 먹으면서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귀족병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밥맛이 없다면 공부든 일이든 다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산골에 잠깐 와서도 싱그러워지는 선근이. 먹을 게 없다던 아이가 군말 없이 잘 먹는다. 첫 날은 컴퓨터 게임 생각으로 잠시 흔들리기도 했던 아이. 싱그러운 들판에서 마음껏 뛰어노니 저절로 싱그러워진다. 덕분에 소박한 밥상이 넉넉한 밥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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