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부모 울타리를 넘어

모두 빛 2010. 11. 4. 04:58

아이들은 부모를 자산으로 해서 자라다가 부모 울타리를 넘을 때가 온다. 보통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는 나이를 정하고, 여기에 아이를 맞추려 한다. 그러나 아이마다 그 고유한 개성에 초점을 맞추는 생명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를 넘어서는 때라는 게 아이마다 참 다르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갓난아기라면 엄마만 곁에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 제 발로 일어서게 되면 활동범위도 넓어진다. 이 때는 아무리 멀어도 엄마를 부르면 찾을 수 있는 거리까지만 나아간다. 낯선 곳을 가면 엄마 치마폭을 잡고, 둘레를 충분히 살핀 다음 아이 안에 믿음이 설 때 움직인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 울타리를 넘는 건 부모 철학과 부모가 처한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자연에서 온전히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사춘기까지는 그리 친구를 필요치 않는다. 어쩌면 또래 친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환상 또는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둘레 모든 아이들이 어딘가로 날마다 몰려가는 일상을 지낸다면 아이한테 혼자서 고요히 지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된다. 반대로 고요한 곳에서 아이가 자란다면 괜한 불안감으로 쓸데없이 자꾸 또래 만남을 부추길 필요는 없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부모 울타리를 넘고자 할 때 그 동기가 전적으로 아이에게서 나와야한다는 사실이다. 어른 누군가가 부추긴다거나 교육 문화적 환경이 유혹적이어서 부모 울타리를 넘으려고 할 때는 이러저러한 함정이 도사린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설 때의 동기는 다양하다. 그 첫째는 제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자산을 웬만큼 소화한 상태가 된다. 부모가 갖는 장단점 가운데 장점을 웬만큼 받아들이면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서는 건 축복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아이들은 부모 자산과 장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에 맞닥뜨리게 된다. 신발 한 켤레, 가방 하나조차 그러하지 않는가. 그러다보면 부모 단점에 먼저 눈을 뜨게 되고, 부모 잔소리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부모 자식 사이 믿음의 고리가 생기기도 전에 겪어야 하는, 새로운 자극은 그나마 남아있던 부모 자식 사이 믿음의 끈마저 놓아버리게 한다.

 

이렇게 신뢰에 금이 간 첫째 요인은 대부분 부모 잘못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았는데 등을 떠미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이가 유치원 나이 때쯤인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 적이 있다.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가보는 곳이고, 많이 보아두는 게 좋다고. 근데 그 복잡한 동물원을 다 둘러보고 나서, 아이에게 소감을 묻자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 했다.

 

“응, 나는 엄마 잊어먹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아내가 원했던 건 시간 내고, 돈 들인 체험학습에 대한 성과였다. 근데 보시다시피 이 얼마나 큰 간격인가. 아이가 원하기보다 부모가 원해서 아이 등을 떠밀고, 아이 손을 이끌어 간 보기가 된다. 아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런 보기는 무수히 많지 않겠나. 단계별학습이나 또래 문화 또는 경쟁 문화에 익숙한 부모 세대는 두려움이 많다. 그 두려움을 아이에게 전가하게 된다. 부모가 갖는 긍정적인 자산보다 부정적인 자산을 본인도 모르게 아이에게 물려주게 된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제 발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선다. 부모 울타리를 넘어 자극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온다. 인터넷이나 방송 언론 따위에 온갖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자신만 열려있으면 새로운 세계는 많고도 널렸다. 산골에 살더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러저런 인연들은 많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할 때 흔들리면서 고뇌하면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나가느냐다. 선택의 자유와 배움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며 성장하지 못한 많은 아이들은 선택 자체를 어려워한다. 이 역시 얼마나 큰 불행인가.

 

홈스쿨링 하는 아이가 부모를 넘어설 때 그 부모는 ‘사회적 부모’가 된다. 자식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부모 역시 사회적 부모가 되는 셈이다. 내 아이가 나 아닌 다른 부모(어른)를 찾아간다는 건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집 아이가 내게 온다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아이를 다 내 자식으로 할 수는 없다. 이 때 역시 아이가 고리가 된다. 아이가 부모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그 친구는 역시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나간다는 말이다.

 

부모 울타리를 넘는 아이 성장은 그 부모를 사회적 부모가 되게 한다. 아이가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 부모 되는 마음이란 얼마나 설레든가.  내 아이와 네 아이를 나누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른들. 그런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는 것 역시 설렘이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