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적고 보니 좀 어려운 주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였다. 아이와 어른이 어떻게 친구가 되며, 왜 친구가 되고 싶은가. 어쩌면 이 글은 내가 보다 많은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 친구가 좋다. 그 이유는 많다. 우선 아이들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호기심이 많다. 잘 자라거나 잘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많다. 관심 분야에 집중도가 높고 창조적이다. 어릴수록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솔직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잘 웃는다. 한마디로 아이들은 어른들에 견주어 에너지가 밝고 건강한 편이다. 그런 에너지를 나누고 싶다.
친구가 되자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먼저다. 내가 가장 어린 친구로 꼽는 건 돌 지난 아이부터다. 담이란 아이는 14개월 남짓. 부모 따라 우리 집에 놀러온 아장걸음의 아이다. 아이 부모는 자녀교육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쁘다. 아이가 울거나 사고를 내지 않는다면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나는 부모와 이야기 나누는 틈틈이 담이 노는 모습에 눈이 간다. 아이는 우리 집 물건 이것저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만지며 논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아기는 내가 저 자신을 이해한다 싶으니까,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게 건네주는 게 아닌가. 눈웃음을 지으며.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엑스터시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 눈빛과 웃음이면 충분하다.
윤이라는 아이는 세 살 난 여자 아이. 부모 따라 우리 집에 놀러왔다. 우리는 아이에게 ‘어서 오세요.’하며 말로써 인사를 했고, 아이는 눈으로 했다. 그렇게 아이는 잠깐 눈 마주하고 우리 식구들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그 다음부터 스스럼없다.
아이는 낯선 우리 집과 둘레가 얼마나 궁금할까. 땅도 하늘도 집도 고양이도 나무도 풀도 심지어 우리네 사람까지도. 윤이 부모는 앞날 언젠가는 시골 살아보고 싶단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도 많고 준비해야할 것도 많단다. 그러나 윤이 눈은 맑다. 그 어디에도 부모가 갖는 두려움을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아이는 호기심이 많아, 어른이 하는 걸 다 해보고 싶어 한다. 그게 무슨 일인지 몰라도 따라 해보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말보다 훨씬 많은 걸 몸으로 한다. 윤이가 자주 하는 말은 엄마, 아빠, 밥, 물, 냠냠. 우리 집에 와서 하는 말은 오빠, 언니, 아저씨 그리고 아줌마를 부를 때는 ‘언니 엄마’란다. 저보다 큰 언니의 엄마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아이가 한 말은 모두 해야 100마디도 채 안 되겠지만 그 사이 아이가 한 몸짓은 얼마나 많았나.
헤어질 때, 잘 가라고 손을 흔드니 윤이도 손을 흔든다. 우리 집에 올 때는 눈으로 인사했지만 갈 때는 손을 흔든다. 아주 작은 손으로 간닥간닥. 윤이를 다시 만날 기약은 없지만 잠시나마 친구가 된 사이.
그런데 아이들이 언어를 갖기 시작하면 솔직히 친구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몸짓보다 많은 걸 언어를 통해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언어라는 건 자신이 살고 싶은 꿈이니 철학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니 접점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 아이와 친구하기에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관계는 부모 자식 사이다. 가족이라는 혈연과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자주 보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구가 된다. 친한 사이일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지지 않는가. 이 부분은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나타난 아주 획기적인 변화다.
부모가 자녀와 친구 사이가 되면 점차 자녀 친구들과도 조금씩 친구 관계로 발전한다. 일단 자녀 친구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니 자연스럽게 아이 친구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아이들 모임 때면 가끔 얼굴을 마주보니 더 많이 알게 된다. 이 때는 밥도 가끔 같이 해먹고 잠도 같이 자니 시시콜콜 아는 게 많아진다.
이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그 부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면 자신을 쉽게 열어준다. 막힌 것보다는 통하게 더 자신을 성장시키지 않겠나.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이 제 친구들과 나누는 만큼 어른인 내가 깊이 들어가기는 여전히 어렵다. 일상에 관심분야가 크게 다르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막히게 된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는 보통 어른에 견주어 나는 아이들과 친한 편이다. 이 친구들과 ‘성장, 관계, 소통, 어른’ 같은 주제들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제법 잘 통한다. 이 친구들 역시 대부분 학교를 안 다니니 자기빛깔이 다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아이 친구들을 죽 인터뷰해서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날 만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다양하고 재미있다.
요즘은 동시를 쓴다고 아이들과 이전보다 좀더 자주 만나는 편이다. 내 시를 봐주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안 다니고 구분이 없다. 아이들은 어른인 내가 도움을 청하니 기꺼이 함께 해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능하다면 도움받기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를 더 원하지 않는가. 이 때는 아이가 친구라기보다 나를 비추는 거울 또는 내 선생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준다. 도움말을 주는 데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쁘게 해준다.
시 쓰기는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는 여러 디딤돌 가운데 하나가 된다. 시란 일상의 익숙한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볼 때 다가온다. 아이들이야말로 얼마나 익숙한 일상인가. 그만큼 많은 시를 품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그러니 시를 쓴다는 건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게 먼저다. 나 자신이 더 부더러워지고, 더 낮아지기 위한 작은 몸짓이 아닌가. 동요를 작곡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이다. 노래는 어른과 아이 사이 경계를 녹여준다. 나를 녹이면서 함께 녹아든다.
아이들과 좀더 잘 사귀자면 무엇보다 내 자신부터 먼저 열려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드러운데 어른이 딱딱하면 누가 사귀고 싶어 하겠나. 아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어른 생각을 전하고자만 한다면 누가 가까이 오고 싶어 하겠나. 앞뒤가 이러하다면 이 글의 제목은 사실 ‘어른이 아이와 친구하기’가
아니라 ‘어른이 아이와 친구 되기’라 해야 맞겠다.
이 부분은 내 노년과도 관련이 있다. 자녀와 친구할 수 있고, 자녀 친구들과도 다시 친구가 된다면 사위나 며느리하고도 어렵지 않는 관계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또한 손자나 손녀하고도 친구가 되는 관계로 발전하리라 믿는다. 더 나아가 이런 혈연적인 관계를 넘고, 세대나 성별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과도 잘 통하는 관계가 되리라 본다. 노년은 외롭게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 관계 속에서 자이실현과 성장을 완성하는 마지막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아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더 나아가 어른으로서 아이들과 친구할 수 있다는 건 누가 뭐래도 축복이다. 어른으로서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산다는 건 어쩌면 영원을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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