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어른

모두 빛 2008. 12. 4. 07:19

 


마을에 이웃 한 분이 새로 이사 왔다. 캐나다 퀘백이 고향인 니콜라.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멋진 젊은이다. 내년 봄이면 아기 아빠가 되는 새신랑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반나절 정도 니콜라네 집수리하는 일을 거들다 왔다. 거실 중천장에 합판을 대는 일. 그런데 나보다 먼저 니콜라네 일을 거든 사람은 이 마을 아이인 현빈이다. 현빈이는 열두 살 남자아이.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현빈이는 니콜라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니콜라가 자신을 진심으로 존중해주기 때문이란다. 정말 그랬다. 니콜라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거지만 나이가 많다거나 가장이라든가 남자라든가 그런 편견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도 깍듯이 존칭을 쓴다. 외국인이니까 우리말이 서툴러서 그런 게 아니다. 물론 우리말로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는 잘 못하지만 아이들은 존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이들은 말 이전에 눈빛에서 그 마음을 먼저 느낀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이 좋기 마련이다. 이는 어른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도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소중하게 여긴다. 내 어릴 때를 돌아보아도 그렇다. 나는 시골서 자라면서 잘 놀았다. 눈만 뜨면 동네를 쏘다녔다. 동무들과도 놀았지만 혼자 노는 걸 더 즐겼다. 딱지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어 날렸다. 겨울이면 연을 만들고 팽이를 깎고 팽이채를 만들어 얼음에서 놀았다. 부모님은 내게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동네 어른 한분은 내가 잘 논다는 것에 특별히 기특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빙그레 웃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해주시는, 그런 응원 말이다.

 

그 어떤 모습이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소중한 체험이다. 평생 잊혀지지 않는 힘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그 자존감은 자랄수록 점점 커져 자신에게서 남을 향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자존감을 살릴수록 자신도 좋고, 이웃도 좋은 법.

 

그래서인지 요즘 현빈이는 틈나면 니콜라네 집수리 일을 거든다. 이럴 때 현빈이는 결코 어린이가 아니다. 물론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는 아이 그 자체다. 하지만 어른과 어울리면 어른이 되고, 일을 할 때면 어른 몫을 한다. 자기 집안일 못지않게 이웃 일을 거든다. 자신이 자라는 만큼 자존감을 더 키우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런 분위기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전염된다. 얼마 전에는 우리 상상이까지 끼어서 현빈이와 함께 니콜라네 일을 거들었다. 안방 천장을 수리하는 일을 두 아이가 거뜬히 보조를 했단다. 이 집 부부는 아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일을 하는 데 놀라워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른 몫을 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니콜라는 부부관계에서도 가부장적인 권위를 거의 같지 않는다. 이 날도 나와 함께 일을 하다가 중간에 점심을 먹을 무렵에 부인 그랬다.

“여보, 이제 밥 먹게 밥상 좀 치워요.”

 

그러자 니콜라는 군말 없이 상 위에 놓인 공구를 치우고, 거실을 빗자루로 쓴다. 몸놀림 손놀림이 자연스럽다. 점심으로 감자수제비를 맛나게 먹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식구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요리는 물론이고 효소차 담그기나 식초에 대해서도 많이 묻고 배우려한다. 또한 우리가 현빈이네랑 지난번에 냈던 <나도너도>라는 잡지도 흥미 있게 본단다. 기회가 되면 함께 하고 싶단다. 

 

현빈이와 상상이는 다음에 또 니콜라네 일을 거들기로 했단다. 니콜라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와도 소통이 잘 될 것 같다. 그만큼 사람과 세상 그리고 자연에 대해 열려있다는 말이 된다.

 

이 집 부부는 불어도 잘 하지만 영어도 잘 한다. 이 곳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학 공부에 도움을 줄 수 있단다. 나로서는 공부이전에 아이들을 존중해주는 이웃이 고맙다. 서로가 더 깊이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상대방 언어도 배우게 되지 않겠나. 그렇지 않고 무리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어른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부작용만 커진다. 거창한 이념을 앞세운 삶보다 작은 일상의 빈틈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이웃이 좋다.

 

아직은 겨울답지 않는, 따뜻한 날씨다. 점점 겨울이 깊어간다. 이 산골에, 니콜라네 부부가 우리 이웃으로 튼튼히 뿌리내리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