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마치고 난 상상이가 내게 다가온다.
“아빠, 여기 좀 보세요.”
“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입술 근처.
“글쎄?”
“이거 수염 아닌가요?”
그 말 듣고 다시 자세히 보니 그렇다. 입 꼬리 부분이 조금 가뭇가뭇하다.
햐! 이 녀석 봐라. 두어 달 전부터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수염까지. 여드름이야 솔직히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설렘은 사춘기 청소년이 된다는 것이고, 걱정은 아무래도 여드름으로 피부고생을 겪어야하기 때문.
여기 견주어 콧수염은 아주 자연스러운 성장이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면서 여러 번 기쁨을 만끽한다. 출산에 따른 첫 만남, 첫 울음, 첫 하품, 첫 배밀이, 첫 뒤집기...이렇게 아이가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해내는 모습에 대해 부모는 환호에 가까운 기쁨을 느낀다. 아기 점점 더 자라면서 옹알이를 한다. 그 모든 순간들이 짜릿하다.
이렇게 아기 때 느끼는 성장의 기쁨은 말없이 이루어진다. 아기 몸짓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고, 아기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된다. 여기에 견주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기쁨이 생긴다.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서운함보다 먼저 기쁨을 누린다. 아기가 처음으로 말을 했다고. 그 다음은 자신도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아빠라는 말을 자꾸 가르치고 싶어 한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도 되지만 한 인간을 크게 성장시키기도 한다. 뇌를 발달시키고, 마음을 나누며, 감정을 해소하기도 하고 또 고양시키기도 한다.
반면에 언어는 성장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언어를 제대로 존중해주지 않을 때 성장이 왜곡된다. 쌓인 감정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숨긴다면 아이는 욕을 더 쉽사리 배우고, 자랄수록 부모와 단절을 겪게 된다. 아이를 무시하는 언어, 학대하는 언어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망가뜨리고 파괴 한다.
사춘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이가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문턱. 성호르몬이 활발하게 나오면서 남자와 여자라는 고유의 성을 자각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남자가 남성이 되고, 여자가 여성이 되는 기쁨. 이 때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 놀라게 된다. 수염이 나고, 몽정이나 배란을 통해 아기 씨앗이 생기는 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성장과정의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덩달아 이성에 대한 설렘은 사춘기 청소년이 갖는 특권에 가깝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기쁨인데 요즘 적지 않은 청소년들은 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편이다.
흔히 사춘기 반항이니 성장통이니 하는 말을 많이 한다. 왜 반항을 하고, 왜 아픔을 느껴야 하는가? 아이들마다 처한 조건이 다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강제된 교육 환경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아이 몸과 마음에 맞는 자연스러운 성장보다는 아이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지나치게 사회화된 성장.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데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늘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자신이 잘하는 걸 기뻐하기보다 자신보다 앞서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그 만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다.
여기 견주어 자연스러운 성장은 자기 몸과 마음의 변화에 민감하다. 우리 몸이 곧 자연이기에 누가 하라 하기 전에 스스로 그렇게 한다. 가끔씩 키를 재어보고 몸무게를 달아본다.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고 여드름이 생기는 지, 더 심해지는 지, 다른 변화는 없는지...이리 보고 저리 살핀다. 음식에 대한 절제 역시 두드러진다. 예전에 즐겨먹던 과자나 초콜릿을 자연스럽게 멀리한다. 피를 맑게 하는 음식을 찾게 된다.
같이 사는 식구들 역시 청소년이 일상에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픔과 기쁨을 함께 누린다. 여드름에 대해서는 같이 마음 졸이고, 과자를 멀리하는 데는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남자애들 변성기 목소리만 해도 그렇다. 요즘 상상이는 변성기다. 쉰듯하면서도 굵직한 목소리. 어쩌다 조금 큰소리를 낼 때면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오니 변성기라는 게 두드러진다. 그 순간, 잠시나마 현실이 아닌 마법의 세계에 와 있다는 착각을 할 때도 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전히 사내 녀석 하나 곁이 있을 뿐이다. ‘짜식, 어른이 되어가는군.’ 그러면서 걱정도 되니 한 마디 한다.
“야, 너무 큰 소리 내지마. 변성기니 조심해야지.”
여드름이야 축하하기 어렵지만 콧수염이나 변성기는 마음껏 축하할 일이 아닌가. 첫 배밀이, 첫 뒤집기처럼. 콧수염 기념 축하 잔치를 하기로 했다. 잔치가 별거인가. 음식 하나 해서 마음을 나누면 되는 걸.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떡은 역시나 찹쌀떡. 이번에는 대충하는 게 아니라 축하 뜻을 담기 위해 아내 의견을 찬찬히 들어가며 정성을 기울였다. 사춘기 잔치 음식답게 특별히 대추도 넣었다.
아이에게서 뭔가 사춘기 변화가 보일 때면 잔치를 할 생각이다. 아이 좋고 부모 좋은 잔치, 이번에는 콧수염 잔치다. 다음에는 또 무슨 잔치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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