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글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적어본다. 만화를 읽고 있는 데 느낀 게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중간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처음이다. <유리 가면>. 미우치 스즈에가 70년대부터 그려온 일본 만화로 아직 완결이 안 된 상태.
이제까지 나온 연재물 가운데 지금 절반을 읽었다. 나는 자라면서 만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60년대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기에 만화는 물론 책조차 볼 기회가 없었기에 그랬다. 책을 잘 ‘모르고’ 자연을 벗 삼아 놀면서 자랐다.
그런데 나이 50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만화라니…….이게 다 아이들 덕인 거 같다. 우리 아이들은 만화라면 가리지 않고 거의 다 본다. 심지어 인터넷을 구석구석 파고들면서까지 괜찮다 싶은 만화를 찾아본다. 그러다가 이건 사는 게 좋겠다 싶은 만화가 있으면 자기 돈을 투자한다. 상상이 지식과 상상력은 이 만화에 영향을 받은 게 적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유리가면>은 우리 집에 왔던 손님이 택배로 보내는 준 것이다. 손님과 무슨 이야기 끝에 괜찮은 만화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보내달라고. 그래서 <북해의 별>이랑 <올훼스의 창> 해서 만화 두 상자가 갑자기 생겼다.
이 가운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만화는 <북해의 별>. 이는 단지 다른 만화에 견주어 두텁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주제도 좋고, 아내도 추천을 하고. 여기에 견주면 <유리가면>은 얼마나 두터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북해의 별>을 다 보고 비가 계속 오는 것이다. 식구들이 보다가 집안 여기저기 뒹구는 <유리가면>. ‘이건 무슨 만화인가?’ 묵직한 만화책을 한권 들고 중간 어디쯤인가를 펼쳤다. 아, 그런데 빨려드는 게 아닌가!
‘비도 오는 데 한 권만 보지 뭐.’ 이렇게 자신을 달래가며 1권을 읽기 시작. 읽는 내내 숨소리조차 멎은 듯 했다. 1권에서는 연애에 대해서는 별달리 느끼는 게 없다. 그럼에도 푹 빠지는 건 만화가 주는 구성과 소재로 나오는 연극에 있었다.
우선 만화가 재미있는 건 만화자체가 주는 장점이라 하겠다. 눈으로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 심리 묘사를 작가가 아주 간단하게 바로바로 보여준다는 것. 만화도 예술의 한 형식이기에 극적 장치가 끝없이 숨쉰다는 것들이겠다.
여기에다가 소재가 연극이다 보니 만화 중간 중간에 작은 극적 장치가 연이어 나오게 된다. 만화를 보는 지, 연극을 보는 지 헷갈릴 정도로. 만화도 보면서 연극도 보는 묘한 재미가 겹친다.
그러면서도 긴 호흡에서 성장 만화요 연애 만화이며 경쟁만화이기도 하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야와 그 경쟁자인 아유미는 이제 13살. 집안 환경이 판이하게 다른 두 소녀가 운명적으로 연극을 하게 되고 또 만나게 되며 끝없이 서로 경쟁하고 자극하며 자란다. 그리고 마야가 성장하면서 점차 마야와 연인이 되어가는 마스미와 얽히고설키는 사랑도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내가 다시 젊은이가 된다면 나는 어떤 설렘으로 연인을 만날 것인가 하는 공상도 즐겁게 하면서 보게 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건 경쟁이 아닐까. 누가 이기나. 어떻게 이기나.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어찌 이겨내는가. 이렇게 장기 경쟁을 부추기는 장치는 <홍천녀>라는 아주 특별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배우가 인간이기를 잊고 온전히 자연과 하나 될 수 있을 때에야 만이 연기가 가능하다고 뜸을 계속 들인다. 마야와 아유미가 성장하면서 홍천녀를 연기할 주인공이 되고자 끝없이 경쟁을 펼쳐가니 자꾸 궁금해진다. 그 결과는 물론 과정 하나하나도.
이렇게 나는 <유리가면>에 빠졌다. 그것도 푹.
아내가 그런다.
“아니, 당신이 순정만화를 다 보다니…….”
탱이는 한 술 더 뜬다.
“아빠가 만화를 다 보다니 신선해요.”
식구들은 이런 나를 좋게 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폐인이다. 만화로 인한 폐인.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저녁으로 논밭을 한번 둘러보고, 기껏 반찬 한 가지 하는 정도. 그 외는 대부분 만화를 본다. 방 청소는 물론 이불조차 잘 안 개고, 밭에 풀을 보고도 못 본체 지난다. 만화를 보다가 고개가 아파도 그냥 참는다. 잠이 와서 눈꺼풀이 내려와도 참는다. 폐인도 이런 폐인이 없다. 나는 다른 건 필요하다면 웬만큼 참을 수 있지만 졸리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한다. 밤은 물론 낮에도 졸리면 곧바로 잔다. 그런데 폐인이 되다보니 10시가 넘어 거의 12시 가까이 만화책 한 권이 끝이 날 때까지 보고 잔다. 물론 일어나는 건 여전히 새벽같이.
나만 폐인인 건 아니다. 상상이는 두 상자나 되는 만화책을 일주일도 안 되어 독파했다. 탱이도 그렇다. 청년모임에 갔다가 전날 거의 잠을 안 잔 상태인데도 오늘은 집에 오자마자 <유리가면>을 놓지 못한다. 손님으로 온 명지도 그렇다. 만화에 빠진다는 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개가 꺾였다는 말 그대로. 밥상을 다 차려놓아도 모른다. 누가 불러도 못 알아듣는다. 저절로 아내 입에서 큰 소리가 난다.
“애들아! 밥 먹자, 밥!”
그나마 내가 완전한 폐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 만화에서 흠을 느끼기 때문. 나는 경쟁만화라는 게 걸렸다. 중간 중간에 ‘너무 하다. 이럴 수 있나’하며 안타까움이 자주 전해졌다. 이를테면 엄마가 보낸 마야의 내의와 편지를 마야 선생이 단호하게 불태우는 장면이라든가, 마야가 유명해지면서 더 큰 이벤트를 위해 사장이 어머니와 상봉을 돈으로 막으려는 처사들이 너무 비정하다. 경쟁 사회가 갖는 또 다른 잔혹함이겠지만 작가가 이를 ‘예술’로 극화 시키는 건 또 다른 숙제라 보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잔혹함이 독자 뇌리에 남는다는 건 그리 좋은 거 같지는 않다. 물론 아이들 성장과 교육에도 깊은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부분들이다. 어른들의 욕망을 위해 아이를 도구화하는 비정함과 상처는 쉽게 용납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나로서는 한 템포 쉬어가면서 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이제 절반을 본 상태. 14권까지 다 본 다음에 나는 어떤 상태일까. 지금보다 더 폐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그런데 자꾸 보고 싶다. 평소에 마음보다 몸을 더 중요시 하는 내가 지금은 마음에 이끌리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지는 싸움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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