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몸 공부, 마음 이야기

딸과 함께 쇼핑을 하면서

모두 빛 2008. 7. 13. 19:55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한다. 예전에 탱이랑 쇼핑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는데 오늘이 딱이다. 약속은 이런 거였다. 그러니까 탱이가 책을 내게 됐다. 어린이 잡지에 3년째 연재하던 <토끼 밥상>을 묶어 출판사에서 여름방학 무렵 책을 낼 예정. 그런데 출판 계약을 하면서 이어지는 뒷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책을 낸 다음 아이들을 대상으로 요리 교실을 열어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요리 교실을 진행하는 건 당연히 탱이 몫.

 

이 말을 곁에서 듣는 순간, 내 딸이지만 탱이가 대견했다. 책도 내고 아이들에게 강의도 하고. 무더운 여름, 탱이가 책 원고를 마무리하는데 나도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생각을 해보니 탱이는 옷이 적다. 옷을 잘 안 사는 편이다. 사촌 언니들한테 물려받거나 이웃들한테 얻어 입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탱이가 아이들 앞에서 요리 교실을 진행하자면 어느 정도는 차려 입어야 하지 않겠나. 원고를 최종 마감하면 내가 탱이에게 옷을 한 벌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식구가 함께 전주를 나갔다. 큰 맘 먹고 롯데 백화점을 들어서는 데 차가 엄청 밀린다. 지하 주차장으로 3층까지 내려갔는데 꽉 차 한 층 더 아래로. 여기에서도 다른 차가 빠져나갈 동안 잠시 기다려야 했다. 인산인해(人山人海)가 아니라 그야말로 차산차해(車山車海)다. 불황이요 불경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여성복 매장을 찾아 2층부터 둘러보다가  6층으로. 캐주얼을 파는 곳. 이 곳에서 한참을 고른다.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손길들이 연신 옷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나는 처음에는 탱이 곁에서 참견을 하면서 조금 관심을 가졌다. ‘내가 사주는 건데’ 이러면서 생색도 내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큰둥하다.

 

매장 한 귀퉁이에서 앉아 쉬면서 쇼핑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쇼핑은 자신이 주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고르는 맛도 좋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물론 다리 아픈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방관자는 힘들다. 시간도 안 가고, 다리도 더 아프게 느껴진다. 지금 나는 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관자도 아니다.

 

아마 아내가 쇼핑을 하는 데 그냥 따라왔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짜증도 나고. 그런데 지금 나는 딸에게 옷을 사주려 왔다는 사실, 이는 ‘부분 참여’에 해당한다. 기대도 있고 반면에 가끔은 지루함도 있다.

 

지루함을 달래고자 매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옷을 많이 보게 된다. 내 앞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또 많은 옷 가운데 지금 옷을 골라 입는 데는 또 얼마나 여러 번 고민을 했을까.

 

이런 눈으로 다른 사람들이 입은 옷을 보니 다들 새롭다. 다 멋있어 보인다. 일단 나는 옷을 보는 눈이 없다. 차려 입은 사람들의 안목을 높이 살 뿐이다. 이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탱이는 한 시간쯤 고르더니 일단 다른 매장을 가보잖다. 따라 갔다. 또 고른다. 마음에 드는 게 있는 지 옷을 갈아입어본다. 위가 마음에 들면 아래가 마땅하지 않고, 아래가 마음에 들면 다시 위가 어렵고. 아내랑 생각을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티 하나를 골랐다. 아내는 별로인데 탱이가 마음에 든단다.

 

“그럼, 네 돈 내고 사.”

“알았어요.”

 

그렇게 티 하나를 사고 다시 매장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 다른 곳을 둘러보아도 마땅치 않으니 원래 왔던 매장으로 컴백. 또 고른다. 또 입어본다. 들었다 놓았다가 들락날락. 내 느낌은 돈보다 시간을 아낌없이 쓰는 데 대한 아쉬움. 오고 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하루를 쇼핑에 쓰는 셈이다.

 

나는 이렇게 선택이 너무 많다는 게 힘들다. 차라리 이럴 때는 나대신 아내가 “당신은 이 옷을 입어요!”하고 명령하듯 해주는 게 쉽고 편하다. 나는 아무 옷이나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아내만 좋으면 무조건 오케이! 내게 옷이란 몸을 보호하면서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옷에 대해 아주 무식하다. 내가 구분하는 건 속옷과 겉옷, 바지와 치마 정도. 그 외 옷에 관한 말들은 이해를 잘 못한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옷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데 나는 완전 구식 남자가 되었나.

 

드디어 탱이가 치마 하나를 골랐다. 내가 치룬 값이 6만원 남짓. 나는 이 돈보다도 오늘 하루 쇼핑에 든 시간이 돈보다 더 비싸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탱이는 기분이 좋은지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 종알거린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패션쇼. 이 옷 입고 저 옷 걸치고. 앞을 보고 돌아보고 걸어보고 어깨 펴고 웃어보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도 조금씩 바뀐다. 쇼핑이 주는 소심함에서 벗어나 나도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옷이 잘 어울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나도 경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왕 할 거 즐겁게 하면 좋을 테니까. 행여나 길거리 지나가는 누군가를 보더라도 옷을 보는 훈련부터 해 볼까나.

 

그럼에도 지금 내 삶이 새삼 좋게 느껴진다. 아침마다 무얼 입고 나설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무얼 살지 또 무얼 입을 지를 고민할 시간에 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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