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에 한 번 하는 그림모임. 현빈이네 식구가 우리 집에 도착,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현빈(11)이가 안 보인다.
“현빈이는?”
“차 안에 있어요.”
“왜?”
“그림을 마무리하나 봐요.”
호오! 기대가 된다.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건가. 또 그걸 발표하기 위해 준비하는 아이 모습과 마음까지도 그려진다. 한 오 분쯤 뒤에 현빈이도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지낸 안부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 모임에는 그림 공부를 끌어가는 은성씨가 몸살감기로 오지 못했다.
각자 그려온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번에는 전체 성적은 좋지 않다. 현빈이 상상이 탱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넷만 그려왔다. 어른들은 대부분 그려오지 못했고, 막내 채연이도 그리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주었던 현빈이가 먼저 그림을 펼쳤다.
“오!”
“잘 그렸네!”
현빈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이가 그려온 그림은 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앞발을 들고 힘차게 뛰어오르는 모습. 역동적이고 실감 난다. 사진으로는 그림과 이를 설명하는 아이 모습을 다 담아 실감이 덜 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어땠어?”
“감격하면서 그렸어요.”
이제까지 아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만족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감격을 누렸다니! 그림을 그릴 때 대상과 얼마나 일치 하는가 또는 남보다 얼마나 잘 그리는가를 견줄 필요가 없다. 굳이 견준다면 ‘예전에 자신이 그렸던 그림보다 얼마나 몰입을 했고, 또 더 나아졌나’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순서로 그렸니? 구도를 잡고 했어? 아니면 바로 그려나갔어?”
“바로 그렸어요.”
“그린 순서를 말해봐.”
“먼저 머리부터 그리면서 앞쪽으로 내려오고 그 다음은 등 쪽을 그리고”
“중간에 지우거나 하지는 않았어?‘
“지우기도 했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렸니?”
“음, 한 10분쯤.”
“정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 시간 개념이 정확치는 않다. 10분 만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현빈 엄마가 덧붙인다.
“엄마가 보기에 30분은 걸린 거 같은데...”
시계를 보고 그림을 그린 게 아니기에 시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두 사람 이야기를 나대로 해석을 하자면 몰입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몰두해서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나 역시 그림에 빠져 있다가 시계를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난 걸 경험한다. 내 생각에는 한 20-30분 정도였는데 시계를 보면 놀라곤 한다. 그만큼 현빈이도 그림에 몰입을 했다는 것이다.
현빈이가 대여섯 살 무렵에는 가재를 자주 그렸다. 당시 아이는 가재 박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재를 좋아했고, 잘 잡고, 잘 먹었다. 가재 이야기를 물으면 막힘없이 이야기 했고, 이를 그림으로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요즘 현빈이는 말을 자주 그린다. 말을 좋아하고 언젠가 자신도 말을 키우고 싶단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본다. 대상을 아는 만큼 그릴 수 있고, 그리는 만큼 더 잘 알게 된다. 상상이는 자신이 연재하는 소설 속 주인공을 그렸다. 지난번 그림보다 좀더 현실감이 있다. 탱이는 달거리 그림책에 들어갈 그림을 한 장 그렸다.
이번 모임에서 느낀 건 시간을 정해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려야 한다. 나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그림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그림에 자신이 없고 또 성격이 소심하니 스케치 하는 데 시간을 대부분 써버린다. 색칠을 하려다 보면 종이 울린다. 그 때의 아쉬움이란! 그렇다고 노는 시간까지 그리게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 늘 미완의 그림으로 끝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겪은 아쉬움과 지금의 현빈이가 느낀 감격이 교차된다. 감격하면서 그린 그림은 또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종이 치든 말든 그리던 그림은 마저 그려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나. 그랬기에 현빈이는 차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림을 마무리한 셈이다.
그림에 대한 열정.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는 과정은 물론 다 그린 그림 모두가 예쁘다. 이번 그림모임에서는 어른들의 빈자리를 아이들이 톡톡히 채워준다. 아니, 빈자리를 넘어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서서히 아이들이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아이의 성장 에너지가 내게 느껴진다.
현빈아, 네가 우리 곁에 있다니 아저씨는 참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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