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다시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한달 쯤 되어간다. 다른 사람들은 색칠을 잘도 하는데 나는 계속 조심스럽다. 자신이 없다. 연필로 스케치도 잘 못하는 데 색칠이라니. 자신에 대해 부끄럽고 웅크리는 모습. 그리고 보니 너무나 나답지 않은 모습이다.ㅋㅋ
연필로 그리는 거는 잘못되면 지우개로 지우면 된다. 그런데 색칠은 지울 수가 없다. 그림을 즐기기보다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내 안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색칠 하고 싶은 그림을 구상했었다.
하지만 선뜻 색칠을 할 수가 없었다. 뜸을 들이고 머릿속 구상을 다시 고치고 하면서 다른 그림책도 보곤 했다. 그리고도 안심이 안 되어 그림책 몇 권을 옆에 두고 그려보기로 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수수를 거두면서 오는 느낌이었다. 고개 들고, 위로 올려다 본 수수 이삭과 그 위로 보이는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 그리고 위에서 쏟아지는 가을햇살. 이 모두가 내 안에 그득한 느낌이었다.
색칠을 하고 싶은 데 무엇으로 할까. 우리 집에 있는 거는 색연필, 크레용, 파스텔, 수채화. 수채화는 자신이 없고, 그나마 학창 시절에 한두 번 해 본 파스텔로 해 보자. 구름 먼저 슥슥. 그 다음 크게 벌린 손. 앗, 너무 진한 색이다. 얼른 부드러운 살색으로 바꾼다.
색을 칠하는 내내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억압을 보아야 했다. 누구에게 보여줄 그림도 아닌데 말이다. 돌아보면 이런 두려움과 억압은 십여 년 학교 다니면서 겪었던 학습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교사의 권위에 순응하고, 남보다 못하면 놀림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눈치 보기. 자기 안에 솟구치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보다는 인내나 절제라는 잣대로 감추어야하는 위선.
지금 나는 예전의 억압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그려보니 그게 아니다. 한 시간 가량 내 안의 두려움과 맞서며 그림을 다 그렸다. 처음에는 기쁘게 그리자고 시작한 건데 과정에서는 치유를 경험한다. 두려움을 녹여내는 과정이 아닐까. 그래서 기쁘다.
내 그림을 본 아내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좋은 데요. 당신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색깔은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사람이 색깔을 위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되면 어때? 못 하면 어때? 다시 주문을 건다.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고 싶은 색깔로 팍팍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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