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자연과 하나 되기

우리 식구 여름나기( 초록마을 37호)

모두 빛 2007. 8. 4. 13:24
 

 


  여름이 되면 논밭의 주인은 곡식이 된다. 이랑마다 빈틈없이 곡식이 들어찬다. 고구마와 호박은 땅바닥을 뒤덮고, 콩은 무릎께로 자라니 사람은 고랑마저 다니기가 어렵다. 옥수수와 야콘 그리고 수수 밭으로 가면 이 건 완전 곡식 숲이다. 사람 키보다 더 자라, 그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다. 이제 막 돋아나는 여름풀은 곡식 기세에 눌러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고추가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끈으로 묶어주거나 가을김장 농사를 준비하며 틈틈이 밭두렁 논두렁에 자라는 풀을 베어주는 정도다. 한 여름에는 무더위 때문에 해 뜨기 전이나 해거름에 일을 한다. 새벽 선선한 기운에 풀을 베고 있으면 서서히 해가 올라오면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겨드랑이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솟는다. 그러다가 해가 산 위로 솟아나면 한증막이 따로 없다. 가슴사이로 땀이 줄줄이 흐르며 속옷이 젖는다. 일을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땀 흘리고 마시는 물 한 잔의 맛>

  이 때 집에 올라와 마시는 물 한잔. 세상에 이 보다 더 맛있는 맛이 있을까. 뱃속 깊숙이 물이 빨려든다. 온몸으로 물이 퍼지는 것 같다. 땀 흘리는 게 몸 안에 노폐물을 몸 밖으로 버린 거라면 지금 마시는 물은 몸 구석구석을 돌며 빈 곳을 촉촉이 채워준다.

 

  간단히 샤워하고 먹는 아침 밥상은 꿀맛이다. 여름이 되면 농사지은 햇곡식들이 하나둘 밥상에 오른다.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풋고추, 가지, 애호박…….바구니에 담기만 해도 풍성하다. 복잡하게 요리하지 않아도 입맛을 돋운다. 이따금 콩국에 국수를 말아내면 더위를 잊는다. 더울수록 오이와 토마토가 당긴다. 그래서 제철음식이리라. 땀 흘리고 일하다가 눈앞에 보이는 붉은 토마토는 그 자체로 유혹적이다. 오이를 보면 서늘한 기운이 전해지며 ‘나를 드세요’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여름 낮 무더위는 굉장하다. 이 더위를 피해 나무그늘에도 앉아 보고, 냇가에 가 발도 담가 보지만 오래 있기는 어렵다. 벌레도 성가시고 자세도 불편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집안이 오히려 더 시원하다는 걸 느낀다.

 

  이게 바로 흙집이 주는 자연 에어컨이 아닌가 싶다. 집 둘레에 나무가 많고, 집 뒤로는 산이 솟아 있어 뜨거운 열기를 식혀준다. 거기다가 더운 공기가 두터운 흙벽을 통과하는 사이 서늘하게 식나보다. 이렇게 산골에 살다 보니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바람을 맞아본지가 얼마나 오래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흙집에도 사람이 많아지면 달라진다. 적당한 공간에 적당히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식구끼리 지내다가 어쩌다 우르르 손님이라도 오면 사람이 난로가 된다. 게다가 손님들이 심각한 이야기라도 늘어놓게 되면 집안 온도는 더 올라간다. 


<자연의 온갖 숨결을 받으며 자라는 생명들>

  언젠가 한번은 정말 더워, 견디기 힘들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순간 곡식이 궁금했다. 이 더위에 어찌 지내나? 가장 더운 날, 가장 더운 시간에 한 점 해가림 없이 밭에 서니 말 그대로 땡볕이다. 고추나 가지 잎은 흐물흐물, 잎이 넓은 호박은 완전히 축 처져 있다. 태양한테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하는 표정 같다. 그럼, 논에 벼는?

 

  궁금함에 작열하는 폭염을 뚫고 논에 가보니 이 곳은 전혀 색다른 풍경이다. 벼는 햇살을 즐기고 있다. 하늘을 항해 죽죽 뻗으며 마음껏 햇살을 받고 있다. 조금이라도 햇살을 더 받으려고 곁에 잎이랑 서로 겹치지 않으려고 부챗살처럼 좍 펼친 모양을 한다. 논물에 손을 담가 보니 따끈따끈하다. 내 몸 온도랑 비슷한지, 논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싶을 만큼 편안한 느낌이다. 뜨거운 햇살이 계곡에서 흘러들어온 찬물을 따끈하게 데운 거다.

 

  벼는 더운 기운에 잘 자란다고 배웠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고 논물에 손을 담가보니 무더위가 고맙기까지 하다. 우리네가 먹는 양식은 바로 자연의 온갖 숨결을 받아들이면서 자라고 열매 맺는 게 아닌가. 이따금 무더위로 짜증날 때는 벼를 생각한다.

 

  정작 우리에게 여름이 두려운 건 홍수와 태풍이다. 하늘이 하는 일은 정말 누구도 모른다. 지난해 태풍이 적었다고 올해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난해 논밭과 도로를 할퀴고 간 홍수가 올 해는 어떨지 역시 모른다. 밤새 폭우가 쏟아지면 산사태 위험으로 마음을 졸이게 된다. 태풍은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곡식에게는 적지 않는 시련이다. 풋고추는 비바람에 줄줄이 떨어지고, 한창 알이 굵어야 하는 옥수수는 이리저리 넘어지고 널브러진다. 설익은 과일도 비바람 앞에서는 그냥 자신을 내밭기는 수밖에 없다. 하늘을 원망해봐야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 이래저래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된다. 쓰러진 곡식을 일으켜 세우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뭉게구름을 피우고 해는 구름 속으로 들락날락 숨바꼭질을 한다.

 

그래, 하늘은 하늘이다.  

 

홈페이지 : http://www.nat-c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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