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농사와 사는 이야기

처조카네 방문

모두 빛 2017. 1. 12. 09:13

처조카한테서 연락이 왔다. 아기 물건을 전해줄 게 있단다. 내용을 떠나 참 반가운 전화였다.

 

사실 바쁜 현대생활에서 말이 조카지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내 조카가 아닌 아내 조카. 서로 사는 것도 다르고, 거리도 멀고, 나이 차도 많고...몇 해에 한번 집안 경조사가 있을 때 잠깐 얼굴 보는 게 다다.

 

처조카는 우리 집을 한번 들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막상 때가 되니 몸 상태가 별로였나 보다.

이모,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려울 거 같아요. 감기 기운이 있어.”

그래. 아쉽네. 아무쪼록 몸 조리 잘 해라.”

 

며칠 지내면서 아내는 이리저리 생각을 하더니 나한테 제안을 한다.

여보, 이참에 우리 조카네 한번 안 가볼래요? 얼굴도 보고 물건도 실어오고.”

글쎄. 나도 보고 싶긴 한데. 내가 복잡한 도시로 운전 안 해본지가 오래라.”

 

나 역시 이틀쯤 뜸을 들였다. 과연 내가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짬을 낼 수 있을까. 그러다 아주 추운 날, 가기로 했다. 너무 추우면 어차피 일을 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새벽 최저 기온이 영하 14, 낮 최고 기온이 영하 5도인 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조카한테 줄 농산물과 발효식품을 고루고루 넣어, 한 상자를 마련해서.

 

서울 못 미처 사는 조카네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조카는 워킹맘인데 마침 몸이 안 좋아 휴직 중이다. 조카가 하는 일은 대기업 전자기기 디자인. 직급은 팀장이다. 한창 왕성하게 일을 해야 하는 나이이자 직급인데 몸이 탈이 났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일차적인 원인이지 싶다. 내가 아는 여러 조카들 가운데 무척이나 자기관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서로 근황을 나누는데 내가 끼어들 틈이 제법 보인다. 건강, 인공지능, 자녀교육.... 처음에는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일찍 몸이 망가진다. 그만큼 일이 많고 버겁다는 걸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제가 최근에 하는 일이 인공지능 쪽이었어요.”

, 그래. 나도 관심이 많은데.”

이 분야가 새로운 영역이라 일이 엄청 나요. 게다가 디자인 영역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들과 공동으로 해결해야할 부분도 많고, 무엇보다 3년 정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하는 창조적 분야거든요...”

 

이렇게 이야기에 불이 붙으면 한 가지 주제로만 한 시간 후딱 갈 정도였다. 아내도 자기 조카랑 따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내가 많이 나선 꼴이 되었다. 고생하면서 운전한 보상을 받고 싶었나. 조카가 내 이야기를 잘 받아주기도 했다.

 

정성껏 차린 점심 얻어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어느 듯 일어설 시간이다. 나는 웬만해서는 장거리 운전을 왕복해서 안 하는 편이다. 조카 역시 자고 가라고 우리 부부를 잡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집이 편하다. 다음에 여유가 되면 우리 산골로 한번 오라고 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한창 일을 시작할 나이의 청년들은 취업 문턱에서 헤맨다. 왕성하게 성과를 낼 중년들은 너무나도 빠른 세상의 변화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주저앉는다. 이 흐름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깊이 짚어보아야 한다. 우리 둘레에 40~50대 치고 몸과 마음이 성한 사람이 드물다. 그동안 자본주의식 경쟁 체제가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긴 했지만 그 그늘은 점점 짙어간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는 한 개인, 한 가족, 한 기업,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넘는 거 같다. 인류적인 공동체로 해결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한 시대로 접어드는 걸 어렴풋이 다시 느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