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오래 달리기는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그런데 마라톤이라.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해도 뛸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이웃들과 가볍게 산책삼아 걸으리라. 근데 대회장인 진안 용담댐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제법 많다. 여럿이 모이면 열기가 나는 법. 각양각색의 옷차림. 반바지, 반팔, 등번호까지 달고. 여기저기 몸을 푸는 사람들.
대회 이름이 ‘제1회 진안 홍삼 마라톤 대회’. 행사무대 쪽으로 가니 경쾌한 음악. 여기저기 부스에서 바삐 움직인다. 사람들이 내 예상보다 훨씬 많다. 얼추 500여 명이란다. 단체로 참여한 사람들. 진안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외국인도 보인다.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분위기 탓일까. 일단 나도 한번 뛰고 싶다. 비가 온다고 나는 긴 바지에 긴팔 게다가 잠바까지 걸쳤다. 접수를 했다. 배번호를 받았는데 아내가 정성껏 달아준다. 이 차림으로 뛰기는 아무래도 그렇다. 잠바를 벗어 보관소에 맡겼다. 휴대전호는 아내한테 맡겼다. 신발 끈을 제대로 매고 출발지점에 섰다. 완주팀이 먼저 출발. 우리 5키로 종목은 맨 나중에 출발.
참가자들이 우르르 나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가 간간이 와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달리기에는 좋다. 댐 위를 곧게 뻗은 다리를 건너, 조금 더 뛰자 일 키로 미터 구간. 내가 추월하기보다 나를 추월하는 사람이 한결 많다. 한참 더 달리는 데 곁에 한 사람이랑 뛰는 속도가 비슷하다.
곧이어 우리 팀인 경선씨가 내 옆으로 왔다. 이 분은 풀코스는 물론 100키로 코스도 완주한 베테랑이다.
“5키로 뛸만하지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처음이라.”
“그저 살살 뛰면 되요.”
이제 이키로. 조금 더 가니 오르막길. 이 때 호흡조절이 잘 안 되어 숨이 가쁘다. 100여 미터 더 가니 내리막길. 장딴지 긴장이 풀린다. 이제 반환점이다. 물 조금 마시고 확인티켓을 받았다. 마음이 가볍다. 이번에는 오르막길도 호흡조절을 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몸에 집중. 뛸수록 목표지점이 가까워지니 갈 때보다 쉽다. 경선씨한테 틈틈이 이런저런 경험도 들었다.
“달리다보면 사람도 사귀게 되요. 심지어 100키로는 밤새 달리는 데 그러다보면 서로 많이 친해져요.”
이제 200미터 남았다.
‘좀 더 속도를 낼까? 아니다. 괜히 무리다.’
결승점이 눈앞이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골인. 32 분 걸렸다.
뿌듯하다.
오래 달리기에 대한 내 트라우마는 고등학교시절에 생겼다. 체력장 시험의 하나인 오래달리기가 너무 싫었다. 어느 순간, 나는 오래 달리기는 못하는 몸이라고 나를 가두었다. 이번 달리기는 그런 나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평생 처음 뛰어본 마라톤. 여러모로 신선했고,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수백 명 가운데 섞여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는 느낌. 나보다 앞서가는 어린이들. 부부가 나란히 뛰는 모습. 용담댐 호수와 이제 막 시작되는 단풍. 반환점을 돌아, 나보다 더 천천히 달리는 이웃들과 다시 만남, 겨드랑이 가슴 등짝에서 스믈스믈 나는 땀...그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오래 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년이면 환갑인데...
‘다음에는 10키로 미터 종목도 달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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