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아이들도 보살피는 걸 좋아한다(2), 은새를 보면서

모두 빛 2011. 8. 28. 10:15

아이들은 어른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어른 처지에서는 어린 아이를 보살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고...근데 이런 일들이 무거운 짐이기만 할까. 여기서 벗어나려면 돈을 많이 벌면 될까.

 

나는 여기서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자고 말하고 싶다. 그건 아이들도 아이들 나름 일을 좋아한다는 거다. 여기서는 여러 일 가운데서도 보살핌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볼까 한다.

 

늘 보살핌을 받아야한다고 여기는 아이들. 그건 어른 기준이다. 아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아이들도 보살피는 걸 좋아한다. 가장 쉬운 보기가 동물 돌보기다. 고양이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키운다면 아이들은 이들 동물을 돌보고자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내가 생각할 때는 자존감이나 존엄함이 아닐까 한다. 아이가 어려서 충분히 뜻을 말로 나타내지 않아서 그렇지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기만 하는 걸 싫어한다. 부모가 자신을 보살펴주듯이 자신도 누군가를 보살펴주고자 한다. 가장 쉬운 상대가 아마 동물일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보살피려는 몸짓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몸으로 익힌다. 어린 나이라는 게 도대체 몇 살부터일까. 나이를 거슬러 가보자. 아기가 자라, 젓가락을 잡을 수 있다면 스스로 젓가락질을 하려한다. 비록 밥이나 반찬을 흘릴 지라도. 부모가 아이를 날마다 먹여주는 건 힘든 일이지만 아이 자신이 스스로 하는 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즐거운 일이다. 아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한다.

 

며칠 전 우리 집을 다녀간 손님 이야기를 보기로 들어보자. 저 멀리 홍천에서 ‘농생활연구소’를 꾸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왔다. 어른 열하나, 청소년 하나, 어린이 하나, 아기가 한 사람 해서 열 넷.

 

이 분들이 우리 집을 오면서 시루떡을 한 상자 들고 와, 사람들이 빙 둘러 앉은 거실에다가 나누어 놓았다. 떡을 먹으며 농사 이야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시골에서 문화를 자급자족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근데 이름이 은새인 아기는 이제 17개월 되었단다. 은새는 엄마 품에서 놀다가 분위기가 익숙해지자,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 틈 사이 온 거실을 다니며 이것저것 참견한다. 누군가 은새 입에다가 시루떡을 넣어준다. 이를 받아먹던 은새 역시 시루떡을 어른들 입에 넣어준다. 한두 사람한테만 그렇게 한 게 아니다. 떡을 나누어주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내 입에도 떡을 넣어준다.

 

아이가 하는 이런 몸짓이 모방이어도 좋다. 아이는 어른들을 보면서 배우는 거니까. 어른이 아이한테 떡을 넣어주는 게 즐거우니까 아이 역시 즐겁게 어른 입에 떡을 넣어준다. 아마 어른이 억지로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면 아이는 이를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가 남을 보살피고자 하는 보기 역시 무수히 많을 테다. 이 날 함께 한 열네 살 청소년 하나 역시 그랬다. 거실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다가 은새가 자신에게 오자 아이를 품에 앉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진 카메라를 보여주고 같이 사진을 찍는 걸 해본다. 아이를 보살펴주는 모양새가 자연스럽다. 형제가 있는 아이들은 동생을 보살피는 일을 거의 일상에서 하면서 자라게 된다. 이 청소년은 은새가 친동생이 아님에도 친동생처럼 보살핀다.

 

이렇게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는 것보다 보살피는 걸 더 좋아한다. 보살핌을 일로써 잘 살려갈 때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짐이 아니라 즐거운 교육이 되는 것이요, 아이는 스스로 독립하는 힘을 키우게 되리라. 

 

그렇다고 어른이 아이한테 보살핌을 기대하는 건 지나치다. 아이들이 짐승을 돌보고 싶다고 해봐야 꾸준히 오래 하는 아이는 드물다. 은새가 둘러앉은 사람들 모두에게 떡을 돌리지 않는다고 서운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청소년이 동생을 끝까지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아이가 갖는 그 고유한 사랑이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로서 나 자신이 늙어가면서 자식한테 보살핌을 기대한다는 것 역시 뒤틀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보살핌은 상대보다 먼저 자신을 위한 몸짓이기에.

 

다시 정리하자면 아이가 하고자 하는 보살핌을 일로 발전시킨다는 건 무엇보다 아이 자신을 위한 것이다. 아이가 주인으로 자라게 되고, 덩달아 부모는 아이를 보살피는 데 드는 많은 짐을 덜 수 있게 된다.

 

보살핌은 일방 관계가 아니다. 보살핌은 사람 안에 숨은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일. 어른이든 아이든 나이는 그리 중요한 거 같지가 않다. 아이는 이따금 어른도 보살펴주고자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보살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