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스크랩] <<사랑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

모두 빛 2011. 4. 11. 05:54

(아래 글은 월간 <생활성서>에서 ‘내가 만난 작은 예수’라는 꼭지로 이번 4월 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글 뒷부분이 채연이 이야기라 '이웃을 가족처럼' 방에 올려요.)


나는 영성에는 관심이 많지만 종교가 없다. 성경을 두어 번 본 정도. 처음 글을 부탁받고 좀 당황스러웠다. ‘예수님 가르침대로 삶을 나누고자하는 사람이라’... 신앙이 없는 내게 ‘예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사랑’이고, 뒤이어 주제에 맞게 떠오른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사실 내게 사랑이란 참 부담스러운 주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내세울 것도 없고, 보여줄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내게 사랑이 뭔지를 알려주는 아이들이 있어 조금씩 사랑에 대해 눈 뜨고 있다고 해야 맞을 거 같다.

아이들이 사랑으로 태어난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건 무엇인가. 역시나 사랑이라는 걸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를 끔찍하게 여기는 그런 사랑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아이 자신이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그 자신이 먼저 사랑으로 자라고자 한다는 말이다.


부모 다툼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는 아이들


그 앞뒤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가정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자라기 시작한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큰 아이는 대학조차 가지 않고 어른으로 자랐고, 작은 아이는 여드름 드문드문 청소년이 되었다.

 

우리 네 식구는 일상을 대부분 함께 한다. 같이 밥 해먹고 치우고, 같이 일하고, 같이 수다 떨고, 손님도 같이 맞고, 가끔은 여행도 같이 한다.

이렇게 온 식구가 일상을 함께 하다보니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생생히 지켜보게 된다. 부모가 키운다는 말보다 저희들이 스스로 자란다는 말이 더 크게 느껴진다. 부모로서 한 일이라고는 어릴 때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저귀 갈아주는 게 전부이며, 좀더 자라서는 부모가 아이가 원할 때면 그저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게 다라 할 정도로.

부모가 아이한테 주는 사랑은 많지 않지만 아이가 부모에게 베푸는 사랑은 참 넓고 깊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이 말보다 눈빛이나 몸짓이 먼저이리라. 아이들 눈빛은 그 부모에 견주어 한결 맑고 빛난다. 이를 달리 보자면 자기 앞에 누군가를 그만큼 빛나게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부부싸움을 할 때면 어느 부부나 그렇듯이 아이들 앞에서 하기를 꺼린다. 아이들이 맑은 눈으로 다 보고 있으며, 몰래 싸우려 해도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영혼의 귀로 다 듣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이란 대부분 지나고 나면 싸울 당시, 맑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 부모가 서로 다툰다고 아이들은 둘 가운데 어느 한 편만을 들지 않는다. 부모 두 사람을 다 감싸고 품는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되돌려준다. 부모 삶이 힘들어 보일 때면 고사리 손으로라도 어깨를 주무른다거나 하다못해 예쁜 웃음이라도 지어서 부모 얼굴에 생긴 주름살을 지우려한다. 좀더 자라면 집안일에 식구 한 사람으로서 제 몫을 다 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 자라는 만큼 사랑도 커지는 거 같다. 처음에는 눈치 보며 눈빛으로만 부모를 대하다가 학교를 벗어나고부터는 당당히 끼어든다. 집안 크고 작은 일은 물론 심지어 부부 다툼도 정리해 낸다.

“그만 좀 해요.”

“과거는 지나간 거 잖아요!”

“꼭 해야 한다면 밖에 나가서 하세요.”

 

이런 아이들 덕에 우리 부부는 점차 부부 싸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소한 집안일로 의견차가 생기지 않는 부부는 없으리라. 그럴 때 아이들이 중간에서 도와주었다. 똑같은 말을 아내가 할 때는 귀에 안 들려도 내 딸이 하면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아내 말은 한 귀로 흘려도 신기하게도 아이들 말에는 귀가 쫑긋하게 된다. 맑은 아이 눈을 마주하고, 통통하고 빛나는 아이 입술에서 떨리듯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 자신이 좀더 맑아지고 또 솔직해지나 보다. 그런 만큼 아내와 대화도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나갔다.

 

전에는 아내 감정을 건드릴 말이나 행동을 해 놓고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든가, ‘부부싸움을 안 하고 살 수 없다’는 둥 하면서 어른인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하곤 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거짓이요, 부끄러움인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나는 거다. 감정이 가라앉고 아이들 이야기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자, 그 이야기는 나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곤 했다.

 

그 거울은 못난 부모만 비추는 게 아니었다. 가슴아파하는 아이 영혼도 고스란히 비춰주는 게 아닌가. 감정이 섞인 부부 싸움은 자칫 아이들을 부정하는 짓이며, 아이들한테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이 그랬다.

“엄마 아버지가 서로 어깃장이 나 있을 때면 우리는 설 자리조차 없어요.”

 

아이들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기를 그 누구보다 바란다. 그런 소망의 하나로 큰 아이는 사춘기 무렵에 우리 부부가 다정하게 손잡은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안방 벽 액자에 걸어두었다. 우리 부부에게 이 그림은 그 어떤 경전보다 강한 치유의 힘이 되었다.

 

아이들이 갖는 사랑의 힘을 하나둘 자각하자, 우리 부부는 고민이 있을 때면 곧잘 아이들한테 의견을 물어보곤 한다. 부부사이 의견이 크게 다를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낯선 손님이 오신다고 할 때...지난해 내가 늦은 나이에 시인이라는 직함으로 등단을 한 것조차 다 아이들이 내 시를 봐주고 다듬어 준 덕이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아이들이 품은 사랑의 힘은 내 아이 네 아이 할 거 없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모 욕심으로 아이들을 무작정 몰아가지 않고,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기꺼이 존중해준다면 말이다. 우리 이웃에 연이라는 13살 아이가 있다. 연이 역시 집에서 부모 따라 일도 하고, 강아지도 돌보며, 뜨개질도 하고, 보고 싶은 책도 읽으면서 자유롭게 자란다.

 

내가 연이를 대하다보면 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무 한 그루, 야생화 한 그루를 보는 듯하다. 자랑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빛나고, 하나 꾸미지 않아도 부모한테 물려받은 몸 그 자체로 아름답다.

연이는 손바느질을 즐긴다. 엄마 따라 익힌 솜씨가 제법이다. 자신이 필요한 가방이나 웬만한 생활 소품들을 손수 바느질해서 쓴다. 참 곱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정성이 베인 걸 단번에 느낄 정도로.

 

연이가 갖는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면 물 흐르듯 한 사랑, 물이 스펀지에 스며드는 듯한 사랑이란 느낌을 받는다.

연이한테 내가 자극을 받는 건 ‘사랑으로 관계 맺기’다.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자기보다 서너 살 동생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너 살 많은 오빠들과도 곧잘 어울린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림에 익숙한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르지 않는가.

 

이뿐 아니다. 연이는 어른들과도 잘 어울린다. 그것도 어른들끼리는 사는 게 서로 달라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여도 연이는 그런 어른들 사이를 물 흐르듯 어울린다. 그런 연이를 볼 때면 싫어하는 이웃을 가진 나 자신이 부끄럽다. 작지만 빛나는 사랑을 가진 연이가 부럽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홈스쿨러들은 사회성이 부족하지 않을까?’ 그러나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성장하면 그런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 사회이지 않는가. 식구끼리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성장한다면 남들과 어울리는 것도 자연스럽게 잘 해내지 싶다.

 

이런 아이들을 덕에 나는 부족하지만 나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네 눈으로 나를 보는 마음’이다. 아내 눈으로 나를 보고, 아이들 눈으로 나를 보며, 이웃들 눈으로 나를 본다. 이렇게 해 보니 내가 가진 사랑은 참 작고 낮고 좁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사랑 그 시작을 알았다면 첫걸음을 디딘 아기처럼 한발씩 걸어가면 되지 않겠나. 중년 남성이 늦게 익히는 걸음걸이라 서투르고 어색하지만 말이다. 어른들 모두가 때 묻지 않은 아이들한테 눈 맞추고, 이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그 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싶다.


김광화 : 전북 무주에서 농사일 틈틈이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학교를 벗어나 자유롭게 성장하고자 하는 가정들과 함께 <홈스쿨링 가정연대>라는 모임도 꾸린다. 아내와 함께『아이들은 자연이다』『자연 그대로 먹어라』그리고『피어라, 남자』를 냈다.


출처 : 홈스쿨링 가정연대
글쓴이 : 아이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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