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스크랩] 홈스쿨러 사회성(7)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일로

모두 빛 2011. 4. 29. 15:51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욕구는 무척 다양하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먹는 욕구를 시작으로 삶 속에서 다양하게 일어난다. 이런 일상의 욕구를 일로 바꾸어나갈 때 아이 사회성은 자연스레 좋아진다고 했다.

 

이 꼭지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일로 바꾸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글보다 먼저 배우게 되는 게 말이다.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 욕구 가운데 하나다. 문자가 없는 짐승 세계에도 그들만의 말이 있을 정도니까. 어쩌면 말이란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초적 사회성’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일로 바꾼다.’ 이게 쉬운 듯하면서도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그 주된 이유는 대부분의 어른(부모나 교사)들이 아이 이야기에 귀 기울어 들어주기보다 아이에게 뭔가를 자꾸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이게 하루 이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데 일상에서 잔소리 형태로 이어지다 보면 아이는 말하는 법과 심지어 말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린다. 학교라는 곳을 보기로 들면 말하기보다 듣기 시간이 훨씬 많다. 교사는 정해진 수업의 진도를 나가야하기에 구조적으로 그렇다. 만일 40명이 한 반에 수업을 듣는 데, 수업마다 또 아이마다 듣기와 말하기를 같은 비중으로 시간을 나눈다고 치면 진도를 제대로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수십 명 아이들을 부지런히 다그치면서 나가도 쉽지 않는 게 오늘의 교육 현실이 아닐까.

 

듣기와 말하기의 불균형은 학교를 벗어난 홈스쿨러들에게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왜곡된 교육열 때문이다. 아이 교육에 대한 조바심으로 부모가 교사 노릇을 대신하려고 무리하면 아이는 말을 잃어버린다.

 

아이가 말을 잘 하게 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잘 들어주는 게 첫째다. 잘 들어준다는 건 귀 기울어 들어주는 것은 물론 아이 말을 되도록 기록하는 것이다. 아이가 글자를 모를 때는 부모가 대신 기록을 하면 좋다. 이렇게 하는 방식을 ‘마주이야기 교육’라 한다.

 

 아래 보기를 들어보자. 비니는 내가 잘 아는 남자 홈스쿨러로 어릴 때 이야기다.

 

비니 : 엄마, 시어머니는 자기도 며느리를 겪었으면서 왜 며느리랑 잘 못 지내?

엄마 : 글쎄, 모르겠는 걸. 왜 그럴까?

비니 : 엄마는 안 그럴 거지?


어떤가? 많을 걸 생각하게 하지 않나. 게다가 표현 방식은 또 얼마나 예쁜가. 엄마에게 윽박지르듯 ‘엄마는 그러지 마’가 아니라 ‘안 그럴 거지?’라고 물음을 던진 마음이...  이 마음 자체로 아이는 우리 사회를 충분히 건강하고 밝게 만들지 않는가. 이런 아이들은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 희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아이 말을 잘 들어주고 또 이렇게 기록을 할 때 아이는 말을 잘 하게 된다. 아이가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부모가 대신해서 기록을 해두면 아이는 글자도 잘 익히게 된다.

 

아이 말을 존중해서 기록해두면 아이는 글에 애정을 갖게 되니 쉽게 배우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글을 배우고 나면 스스로 기록하는 힘도 쉽게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그 누군가에게 존중받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주 이야기 교육은 보통 말을 익히기 전의 아이들에게 많이 적용한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어떨까? 말도 자꾸 해야 는다. 그것도 일상의 수다를 넘어, 주제를 갖는 이야기를 할 때 부쩍 성장하게 된다. 청소년만 되면 고민의 폭도 넓고, 깊이도 깊지 않는가.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한다면 생각도 그 만큼 알찬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어른(홈스쿨러 부모)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 <홈스쿨링 가정연대>가 치러낸 <성장잔치 한마당>을 보기로 들어보자. 이 잔치를 기획한 동기가 여럿이지만 아이들에게 일을 주고자 한 것도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심포지엄만 보아도 그렇지 않나. 아이들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많은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심포지엄 내용을 채우리라 상상조차 못한다. 그냥 어리다고만 생각한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속이 깊고, 알찬지를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소년들 자신도 자신들이 이렇게 성장하고 있다는 걸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처음 발표자를 정할 때 아이들이 카페에 올린 글을 토대로 의견을 물었다. 다음은 한랑과 나눈 이야기 일부다.

“어때? 심포지엄 때 발표를 해 보지 않겠니?”

“글쎄요. 무얼 하면 되나요?”

"응, 네가 학교를 그만두고 행복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네 목표가 좋은 그림 선생이 되고 싶다고도 했고. 이를 잘 정리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떤 주제로 하면 되나요?”

“<나의 행복, 나의 꿈>, 어때?”

“일단 해보지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막상 발표를 맡아보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몇 마디 하고자 하는 말 이외는 당장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한랑은 발표문을 정리하다가 잘 안 될 때면 내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럼 나는 답을 주기보다 다시 아이에게 묻는다. 되도록 아이 스스로 정리하게끔.

“네가 행복하다고 했잖아? 어떨 때 행복을 느끼니?”

“제가 보고 싶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릴 때요?”

“학교 다닐 때는 어땠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요. 준비물 안 챙겼다고 맞고 아이들은 툭하면 시비 걸고 싸우고...짜증이 많이 났어요.”

...

 

이렇게 하나씩 마음 속 이야기를 하게 하면 줄줄이 나온다. 이제 이를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 있게 발표를 할 수 있게 생각을 정리하면 된다. 그러자면 글쓰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 해보던 발표, 안 해보던 글쓰기라 결코 쉽지는 않다.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를 모르겠어요.”

“음, 그래. 바로 그 이야기부터 글의 시작으로 하면 어떨까? 그럼 그 다음 이야기가 쉬울 거야. 듣는 사람들도 긴장을 풀 테고”

 

한랑은 작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글을 정리했다. 중간에 막히면 또 전화하고...

 

이런 식으로 한랑과 호흡을 맞추다 보니 아이는 그야말로 부쩍부쩍 달라진다. 그러다가 내가 한랑 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아이가 내게 건네준 발표문을 보니 이제껏 보던 아이와 다른 아이가 내 앞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성장잔치 한마당> 심포지엄은 바로 이렇게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일로 바꾸는 한 가지 보기가 된다.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 앞에서 어떤 주제를 놓고 말한다는 건 일이다. 이 일은 아이들에게 성취감을 주고, 성장욕구를 자극한다.

 

게다가 발표를 하자면 생각을 정리하는 글쓰기도 이젠 일이 된다. 글쓰기가 단순히 공부나 숙제가 아니라 일이라는 말이다. 공부와 일은 아주 다르다.  공부는 개인만의 성장이라면 일은 뭔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공부로 하는 글쓰기와 달리 일로써 하는 글쓰기는 한결 성취감이 높게 마련이다. 일의 결과물은 얼마든지 남과 나눌 수도 있기에 그렇다. 또한 이런 글들을 묶어 자료집을 낸 것 역시 작은 일들이 모여 새로운 또 하나의 일로 뻗어가는 보기가 된다. 이런 훈련을 조금만 더 거친다면 책을 기획한다거나 잡지를 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일로 바꿀 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다른 일들로 뻗어갈 수 있다. 이게 바로 성장이자 자연스런 생명교육이 된다. 단 이 모든 동기나 과정 역시 아이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억지로 발표를 하고, 억지로 글을 쓰고, 억지로 자료집을 묶는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결론은 간단하다. 아이 사회성을 제대로 키우려면 아이 욕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이를 되도록 일로 연결하는 게 좋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언제든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다. 아이 사회성을 건강하게 높이려면 어른들이 잔소리 대신 기꺼이 아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자.



출처 : 홈스쿨링 가정연대
글쓴이 : 아이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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