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사는 그림쟁이가 우리 집에 와 있다. 그림쟁이는 그야말로 그림을 좋아해서 붙인 이름. 이 친구는 초등까지만 마치고 중학교부터 학교를 벗어나 자유롭게 자랐다. 물론 대학조차 가지 않는 이제 갓 스무 살의 젊은이다.
이 친구가 학교를 벗어난 지 7년쯤 되었나.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핏기 없는 해쓱한 얼굴로 우리 집을 다녀갔던 게 어제 같은 데 그 사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볼그레한 뺨에 유머가 넘친다. 빵과 쿠키를 잘 굽고, 그림도 잘 그리며, 피아노와 기타도 제법 치고, 노래 부르기도 좋아한다. 농사도 부모 따라 같이 한 게 많아 웬만한 일은 말 안 해도 척척. 그러니 인기가 많다.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며 탱이랑 그림도 그리고 즉석 밴드를 꾸려서 연습도 할 모양이다. 물론 여기 빵 만드는 이웃이랑 일주일에 몇 번 정도 함께 빵을 굽고 또 이를 지역에 나누는 일도 같이 할 예정이다.
그림쟁이 인기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시작이다. 내가 그랬다.
“그림쟁이야, 아점 당번을 같이 안 할래? 아점은 우리 남자 둘이서 하는 데 네가 같이 하면 좋겠다.”
그러자 탱이가 나선다.
“아빠, 그건 아니지. 지난번에 훈이 왔을 때 개가 남자라고 아점을 같이 했잖아요?”
“그러긴 했지. 근데 그 규칙을 이번에 바꾸면 어떨까? 남자들만 하는 거보다 음양이 조화로운 게 더 좋지 않나?ㅎㅎ”
“그래도 당분간 머물 거니까 반반으로 나눠요.”
그림쟁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우리끼리 다 이야기한다.^^ 우리 식구는 그림쟁이를 가족 이상으로 편하게 대한다. 아내까지 끼어든다.
“야, 그러지 말고 두 군데 다 들어오면 어떨까?”
그러자 드디어 그림쟁이가 끼어든다.
“저는 둘 다 할 수 있어요.”
탱이가 중재에 나선다.
“아냐, 밥만 할 게 아니잖아.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해야 하는데.”
(그림쟁이가 구운 쿠키)
그림쟁이 덕에 우리 집에 새로운 문화가 넘친다. 그림쟁이가 가져온 봉화 사과는 달면서도 씹히는 맛이 좋다. 게다가 봉화에서 손수 호두를 까서 짠 호두 기름 맛이란! 이 기름으로 아점에 시금치무침을 그림쟁이가 내어놓았는데 처음 맛보는 맛인데도 정말 좋았다. 쿠키도 빼놓을 수 없지. 그림쟁이가 즉석에서 달지 않는 담백한 쿠키도 구워냈다. 그림쟁이가 피아노를, 규현이 기타를 연주하며 탱이 퍼커션(자그마한 타악기의 하나)+보컬로 해서 들으니 한결 새롭다.
그림쟁이 그림 역시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
“내 캐리커처도 그려줄 수 있겠니?”
“좋아요.”
즉석에서 나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린다. 궁금하다. 나를 어찌 그려놓을 지. 몰입해서 그림을 그리지만 중간에 이야기도 받아준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니?”
“(대상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말고 그려야 해요. 생각을 한다는 거 자체도 에너지가 흩어지는 거거든요.”
드디어 또 하나의 내 캐리커처를 얻었다. 기분이 좋다. 그림만 얻기 미안하다.
“너 혹시 나한테 글쓰기는 안 배울래?”
“좋지요.”
그림쟁이의 이런 재주와 소통 능력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교를 벗어나 자라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내 처지에서 말하자면, 자연스런 성장이 가져다 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림쟁이는 학교가 주는 억압이 싫었고, 딱히 누군가에게 뭘 배우기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만큼 해온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방황도 적지 않았지만 그런 걸 시시콜콜 다 말하기에는 이 지면이 좁지 않나. 그림만 해도 그렇다. 학교를 벗어나, 시간이 많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그리기 시작. 이래도 그려보고 저래도 그려보면서 삶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키우다 보니 실력이 부쩍 는 셈이다.
자신을 화가라 하지 않고 그림‘쟁이’라 한 거부터도 얼마나 상큼한가. 쟁이와 직업은 많이 다를 것이다. 자랄 때부터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면 쟁이가 된다. 그렇다고 쟁이는 직업처럼 그 하나에 매인 게 아니다. 왜냐?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자신이 좋아서 또 하고 싶어서 하는가이다. 돈이니 권력이니 명예 따위에 크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그림쟁이 덕에 새로운 음식에, 새로운 화음에, 새로운 그림에, 새로운 대화에, 새로운 유머에, 새로운 관계가 이어진다. 학교를 벗어나 자기빛깔로 자유롭게 자라는 친구들! 그림쟁이처럼 도시를 기웃거리지 않고, 땅에 뿌리 내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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