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학교를 안 다니면서 나타난 변화는 많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달라지고 있지만 올해가 대략 10년째쯤인가. 대략 몇 가지 특징을 보자면 첫째가 자기 주도성의 강화, 둘째 자기 치유의 회복, 셋째가 소통과 사회성의 확대이다.
여기서는 세 번째와 관련하여 역할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이들이 집에 있다보면 식구 사이 역할이 아주 다양하게 바뀐다. 흔히 말하는 부모 자식이라는 사회 일반의 역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할들을 하게 된다. 즉, 식구 한 사람으로서 자기 몫을 알고 그 자리를 해낸다는 점이다.
한 가족이 자기네 삶을 꾸려가자면 얼마나 다양한 일과 관계와 대화들이 오고가는가. 아이들이 성장하고 또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이러한 관계나 대화들 역시 늘어나고 깊어지고 성장한다. 그러한 보기가 많지만 단 하나, 여기서는 밥상 차리기를 들어보자.
지난 한 해는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을 주었다. 아내는 밥상 차리는 걸 쉬고, 아이 둘과 내가 일년 동안 밥상을 차린 것이다. 이 부분은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넘어간다. 그러다가 올해는 아내와 내가 아점을 차리고, 아이 둘이 점저를 담당해왔다. 이제 이를 정리하고 역할을 조정하기로 했다. 아점은 아내와 아들이, 점저는 나와 딸이.
이렇게 역할을 바꾸기 이전에 지금까지 했던 역할이 준 성과를 정리해본다. 우선 둘이 함께 밥상을 차리니, 둘 사이 관계가 더 좋아진다. 눈에 두드러지게 좋아진다기보다 잔잔하게 달라진다. 먹고 사는 일상이 잔잔한 만큼 잔잔하게 달라지는 거 같다. 아침에 눈 뜨면서 “우리 뭐해먹지? 누나, 오늘 뭐하지?” 먹는 이야기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대화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원초적인 대화. 젖 먹는 아기와 산모가 몸짓 언어로 익히기 시작하는 원초적 대화 말이다. 대화 가운데 가장 바탕이 되는 대화가 참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아내가 식구를 위해 혼자 밥상을 차리는 것도 원초적 대화를 어렵게 했지만 아내를 위한 밥상 안식년도 원초적 대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은 한 발 물러난 상태요, 나머지 식구들은 한 발 더 나아간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부부가 함께 밥상을 차리니 늘 기본 대화가 된다. 살다보면 부부 사이 별 다른 대화가 없이 지나는 날도 많다. 그런데 밥상을 같이 차리면 기본 대화는 늘 하기 마련이다. 이게 생각 이상으로 힘을 발휘한다. 밥은 날마다 먹으니 밥상을 날마다 차린다. 일상의 힘이라고 할까.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힘으로 성장하는 게 바로 일상이 아닌가.
밥상을 준비하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방 몸짓, 표정, 감정, 고뇌를 읽어낸다. 이전에는 부부 사이 서로가 빈틈이 보이면 이를 비집어 싸움이 되곤 했다면 이제는 그 빈틈을 기꺼이 메우려고 한다. 지난 7개월 돌아보면 아내와 말이 잘 안 통해 이야기를 크게 나눈 기억이 없다. 아, 저 사람은 저게 필요하구나. 그렇게 빈틈이 보이면 스스로 다가가 채우려고 한다. 아니면 상대가 “여보, 이걸 좀 도와줄래요?”하는 말들이 이제는 잘 들린다. 나로서는 벽창호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건 괜한 자랑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렇게 인정을 해 주어,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나와 아내가 더 잘 소통하듯이 아이 둘 역시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원초적 대화란 서로를 가깝게 만드는 지름길이자 윤활유다. 탱이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지난 7개월이 어땠는지?
“하하하, 너무 좋았어요. 완전 천국이에요. 작년에는 혼자 한 끼를 했는데, 올해는 동생이랑 둘이서 한 끼만 하면 되잖아요. 게다가 상상이가 마음을 잘 써주어요. 나를 잘 받아주고, 나한테 잘 맞추어주니까. 거기다가 설거지도 둘이서 나누어하니까 이틀에 한번만 하면 되고. 또 수다도 자주 떨지요. 피아노가 어쩌구저쩌구. 신문을 보고난 세상 이야기도 하고. 또 요리에 대해 가끔 동생이 나한테 물어볼 때도 좋고...”
상상이 답은 짧고 명쾌하다. “지금은 다 익숙해졌어요. 시작하고 처음 한달 정도 지난 뒤에 물어보면 몰라도”
이제 익숙했던 역할을 바꾸고자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가 복합되어있다. 밥상을 같이 차리는 사람끼리 더 깊이 소통이 되니 바꾸어보자는 거다. 내가 아내와 더 깊어졌듯이 딸과도 더 깊어지고, 아내는 아들과 더 깊어지자는 거다. 이제는 요리 실력은 나빼놓고는 그리 문제가 안 될 만큼 실력들이 좋으니까, 역할을 바꾸는 것은 더 나은 소통을 위한 선택이 된다.
또 하나는 아이들 성장이다. 올해 들어 두 아이가 부쩍 밖으로 돈다. 웬만해서 밖을 나가지 않던 상상이마저 저희 모임에 애정이 높아졌는지 열심이다. 한번 집을 나갔다하면 일주일이 기본이다. 성인이 된 탱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식구 한 사람이 빠져나가면 솔직히 남은 사람 몫이 조금 부담이 된다. 게다가 자식들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역할 조정을 하면 달라진다. 부모야 어차피 자식 뒷바라지를 어느 정도 하지 않나.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이 한 팀이 되면 자식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부모가 쉽게 메울 수 있으리라 본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또 그 다음 역할까지 머리에 떠오른다. 아들과 아버지가 한 팀이 되어 밥상을 차려보는 것이다. 이 제안을 아들한테 했더니 흔쾌히 좋단다. 그러다보니 올 해말까지 ‘소통의 계획’이 꽉 찼다. 아들이 아버지와 밥상을 같이 차리고 대화를 쉽게 한다면 사회성의 토대도 굳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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