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솟아나는 글쓰기

[스크랩] 불완전한 언어를 빛나게-^^ ^0^ 기호들을 즐겨 쓰자.

모두 빛 2010. 8. 12. 05:32


큰 피해 없이 태풍이 지나갔지요? 예전에 올가나 루사 태풍을 생각하면 참 다행입니다. 오늘 새벽, 이 카페 글들을 읽다가 언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보시고 의견 있으신 분들은 자유롭게 나누어주세요.^^


언어란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요즘 도라지꽃이 한창 피는 데, 이 꽃을 온전하게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그 빛깔이며 모양이며 향기를..새소리 역시 마찬가지. 까치소리나 꿩 소리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하나, 직박구리 소리는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단순하게 들리는 검은등뻐구기 소리조차 그러하지 않는가. 이 새소리를 사람 입말로 하면 호옷호옷. 이렇게 우리말로 쓰고 다시 소리 내어 읽어보면 실제 듣는 것과 전혀 다르다. ㅠㅠ 누구는 이 새소리를 듣고, ‘어절씨구’라는 리듬을 떠올리고, 또 누구는 ‘홀딱 벗고’라는 리듬을 떠올린다. 그만큼 자연을 완전하게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본 모습, 본 소리에서 멀어지는 역설이 생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기분 역시 말이나 글로써 풀어내자면 얼마나 언어가 불충분한가를 자주 느낀다. 그 이유가 뭘까. 언어 자체가 추상화의 산물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 추상화. 추상화란 살은 버리고 뼈대만 추린 걸 말한다.


내 닉네임을 보기로 들면 이렇다. 아이른이 누구인가. 나이는 50대에 남자고 농사를 짓고 글을 쓴다. 아이른은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합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이 정도 설명에 아이른이 충분히 떠오르는가. 아니라고 본다. 그럼, 다시 왜 아이와 어른을 합치는가. 또 아이는 뭐고, 어른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점점 아이른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왜 언어를 쓰는가. 나는 세 가지쯤으로 본다. 하나는 누군가와의 소통이다. 언어를 통해 아기가 엄마를 찾고,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위험을 알리며, 친구들과는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한다. 아주 먼 조상들과의 소통 역시 대부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통의 역할은 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다만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만은 솔직해야 한다.


그 다음은 자기표현이다. 언어를 쓴다고 꼭 누군가와 통해야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성장을 글로서 기록하고, 자신의 감정을 담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기만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불로그를 많이 하지 않는가. (물론 볼로그를 통해 일대일 소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많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라면 카페를 더 좋아할 테고. 이러한 분류 역시 절대는 아니다. 그런 경향이 있을 뿐. 그리고 내같은 경우는 블로그도 하고 카페도 한다. 자신을 나대로 표현하고 싶고, 일대일 소통도 즐기며, 여러 다른 사람과도 소통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지?


셋째는 자기 치유로서의 언어다. 이 글에서 내가 무게를 두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치유의 언어다. 치유, 자신을 바로 보고, 스스로를 보듬으며, 살려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나 역시 돌아보면 부모와도, 학교 선생과도, 친구들과도 그랬다. 이는 결코 우리 부모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성장하던 사회 분위기가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영항이 더 컸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가장 많이 요구받은 질문이 앞날에 꿈 또는 직업이었다. 어릴 때부터 판검사나 의사가 되기를 종용받다 시피 했다. 그러한 꿈에 접근이 잘 안 되는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아름다운 청소년과 청년기를 방황하며 보내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다. (요즘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아주 쿨하게 답을 할 텐데 ㅋㅋ) 부모가 두렵고, 선생이 무서우며, 사회가 막막했다. 언어는 아주 복잡하고 골칫덩어리 그 무엇으로 나를 억압하는 존재일 때가 더 많았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꺼내 훈계나 들을 바에는 아예 입을 달고 사는 게 그마나 숨통이 튀는 상황 말이다.


아이가 한마디 하면 어른들은 열 마디를 하게 되고,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입을 닫고 살게 된다. 이런 경향은 요즘 청소년들에게도 흔하지 않는가. 애써, 어른들 눈길을 피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나. 학교를 다니지 않는 우리 아이들이 어디론가 멀리 여행갈 때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이 “너 왜 학교 안 가고 돌아다니니?”였단다. 아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고, 그 질문을 빌미로 많은 훈계를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닌가.


언어로 자신을 치유해야하는 데는 구조적인 학교 교육의 잘못도 있다. 이를테면 듣기 교육만 많이 받지, 말하기 교육은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 교육 제도. 구조적인 한계다. 좀더 쉬운 보기를 들자. 한 반에 30명의 아이 있다고 치자. 아이 한 사람당 일분씩만 발표를 해도 30분이 후딱 흘러간다. 이렇게 수업을 하다가는 진도를 나갈 수가 있을까. 그러니 대부분 남(선생)이 하는 이야기를 대부분 듣기만 하다가 학교를 마친다. 십여 년을... 황금 같은 기간인데...


자신을 말이나 글로서 제대로 솔직히 표현하는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듣는 만큼 말하고, 읽는 만큼 글을 써야 국어교육은 조화롭게 되는 것이다. 혹시나 이 카페에 국어선생이 있다면 그 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자, 이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된 사람이라면 소통이나 자기표현 이전에 자기치유가 절실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 카페에서도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 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이는 자라면서 듣기만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반작용일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를 좋게 보자면 바로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리고 남 글을 보더라도 칭찬보다는 일단 비판함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은연중에 과시하는 사람도 가끔 보인다. 이런 행태 역시 좋게 보자면 그런 언어를 구사한 본인의 치유라고 여긴다. 다만 이때는 상대방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자신의 치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비판은 늘 조심스럽다^^


사실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언어 이전에 몸짓이나 표정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을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현대사회는 많은 언어가 인간을 지배할 정도로 지나치게 복잡하게 바뀌고 있다. 듣고 싶지 않는 말도 들어야 하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끔 강요하는 지배와 폭력의 문화야말로 우리들을 우울과 방황의 늪에 빠뜨리는 주범일지도 모른다. 하여, 자기중심이 흔들릴 때면 이러한 흐름에 쉽사리 노출되어 같이 흔들리게 된다.


인터넷에서도 몸짓언어가 가능할까. 나는 기호들이 그 기능의 일부를 한다고 믿는다. ^^ ㅠㅠ ㅎㅎ ㅋㅋ ^0^들 말이다. 그냥 글만으로는 감정이나 표정을 다 전달하기 어렵다. 그리고 같은 표현이라도 좋은 느낌인지, 안 좋은 느낌인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많다. 이를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게 바로 기호다. 나는 제안하고 싶다. 이 카페에서 이런 몸짓 언어들을 다시 많이 쓰면 좋겠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 소통도 잘 되고, 자기표현도 되며, 자기 치유도 한결 잘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덩달아 자신감도 높아지리라. 상큼발랄 자유 로망 자립, 이런 단어들이 얼마나 설레는가.^^


언어는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이가 쓴 언어는 빛이 날 것이다.ㅋㅋ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는 자신과 세상을 밝게 하지 않겠나.



출처 : 에브리빰뽐
글쓴이 : 아이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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