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솟아나는 글쓰기

늘 신인(新人)인 시인으로

모두 빛 2010. 7. 18. 08:08

 

어찌하다 나도 시인이 되었다. <동시마중>으로 '등단'을 했다. 기쁘다. 그리고 나를 시인이 되게 해준 많은 사람들이 고맙고, 나를 살게 해주며 시적인 영감을 끝없이 주는 자연이 또한 고맙다. 그래도 가고 싶은 길이 멀기에 신발 끈을 다시 묶는 기분으로, 느낌에 가까운 내 다짐을 적어본다.


우리 식구가 꿈꾸는 삶은 전인이다. 어느 한 분야만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은 답답하다. 한 번 주어진 삶,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마음껏 살려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전인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전인이란 삶을 통합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하나하나 쪼개진 것을 다시 주워 모으는 게 아니다. 본래 사람은 전인이자 통합된 존재다. 아기들에게 놀이와 배움은 둘이 아니다. 놀이가 성장이며, 일도 놀이처럼 한다. 아이 몸짓을 놀이라고 보는 건 어른 눈일 뿐이다. 어린 아이일수록 놀이니 일이니 배움이니 하는 개념 자체를 갖지 않는다. 아이는 통합적이고 전인적인 존재이기에 아이 몸짓은 그 모든 걸 녹여낸다.


그러니 어른 역시 통합적이고 전인적인 존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요리사 따로, 재료를 대는 농부 따로, 이를 먹는 소비자 따로가 아니다. 교사 따로 학생 따로가 아니다. 누군가에 영감을 줄 때는 선생이요, 뭔가를 배울 때는 학생이다. 삶과 시가 하나이며, 시 속에는 느낌이 있어, 이는 노래로 살아난다. 시와 노래가 분리되지 않는다. 시는 눈에 보이듯 그림으로도 그려지기에 시 한편에는 느낌이 있는 이야기와 흥을 살리는 리듬과 바로 눈앞에 그림이 그려져 시를 읽는 이도 함께 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시인 김용택은 영화 <시>에 출연해, ‘시가 죽어가는 시대’라 했다. 그렇다. 시가 죽어가는 암울한 시대다. 시가 죽어가니 덩달아 힘겨운 시인이 많지 않는가.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얼핏 떠오른 건 조각난 삶이다. 시간에 의해 조각나고, 돈에 의해 조각나며, 꿈에 의해 조각난다. 시간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요, 돈은 사람 삶을 편하게 하는 수단이며, 꿈은 지금 삶에 영감을 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조각나다보니 사람을 죽이고, 삶을 죽이는 그 무엇이 된 셈이다. 


이렇게 삶을 조각내는 그 토대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발 딛고 사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다. 아이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가고, 백만 원 벌면 천만 원 벌자고 줄달음친다. 자기 삶은 팽개치고 남 삶을 따라 달린다. 숨 가쁜 열차에서 뛰어내리기를 두려워한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는 김용택이 말한 대로 시가 죽어가는 시대가 된다.


두려움이란

설렘과 달리

심장을 압박하여 몸을 좀먹는 마음 세균

슬쩍 스쳐가는 시적인 순간마져 앗아가는 날도둑

죽음의 문턱으로 한발 한발 끌어들이는, 산 염라대왕

 

복잡한 삶은 머리 아픈 시

꼬인 삶은 뒤엉킨 시

남 따라 가는 삶은 어디서 본 듯한 시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삶은 껍데기 시

아이들 눈치 보는 삶은 어른 옷을 아이한테 입혀놓은 엉거주춤 시

죽어가는 삶은 힘 빠지는 시가 나올 밖에.


시를 살리기 이전에 삶을 살려야한다. 조각난 삶을 모아야한다. 흩어진 가족을 모으고, 부서진 꿈을 되살리며, 몸에 귀 기울이고 자기다운 마음을 소중히 여겨야한다. 가끔은 흙에 맨발 딛고 흐르는 하늘을 보면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다운 본성을 살려야한다. 그게 바로 전인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전인은 되어야하는 그 어떤 짐이 아니라 몸속에 타고난 것이며, 전인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건 설레는 삶의 여정이 된다. 또한 조각난 자신을 치유하는 기쁨의 과정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모두가 다 자기빛깔을 온전히 드러낼 때 오지 않겠나. 그리하여 언젠가는 시가 살아 펄떡이는 시대, 모두가  시인이자 화가이며 작곡가이자 가수이며 춤꾼이기도 한 세상이 오리라 나는 믿는다.


세상이 내게 주는 직함도 있지만 나 스스로 만드는 직함도 많다. 나는 농사를 짓기에 농부다. 책도 몇 권 내다보니 경우에 따라 작가란 이름도 붙는다. 거의 날마다 요리를 하니 요리사다. 나는 소박한 집이라면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으니 목수다. 구들도 놓을 수 있으니 구들쟁이, 문도 짤 수 있으니 소목쟁이도 된다. 가끔 남에게 뭔가 도움말을 줄 때면 선생이 되고, 틈틈이 뭔가를 배울 때는 학생도 된다. 때로는 한없이 소심하여 쉽게 삐치다 보니 좀생이도 내 직함 가운데 하나다.


시인은 최근에 내게 붙은 직함이다. 그전부터도 나는 나를 시인이라고 여겼다. 시가 별거 인가. 감동스런 삶의 순간을 잡아, 이를 눈에 보여주듯이 그려내면 시인이지 않나. 아니, 그리 복잡할 것도 없다. 이오덕은 벌써 오래 전에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고 했다. 가슴에 느낌을 품고 산다면 누구나 시인이지 않는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붙이던 시인이라는 직함을 이번에는 남이 주었다. 동시를 잘 쓰거나 보는 분들이 내게 붙여주었다. 나는 신인이다. 시집 한 권 없는 시인이자, 이제부터 남과 함께 하는 시를 쓴다는 뜻이 된다. 좀더 책임감 있고 당당하게.


그런다고 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삶이 시가 된다고 믿기에 그냥 열심히 살면 된다. 다만 살아가다 느낌이 있을 때 이를 조금 더 느껴보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세워,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시인의 삼단논법>


시는 새로운 세계를 연다.

나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늘 신인(新人)

 

시를 쓰되

늘 신인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