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위 글은 최근 고대 한예슬님이 학내 대자보로 쓴 글 가운데 일부다.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나로서는 ‘적자세대’와 ‘자기 밥’라는 단어가 강하게 끌린다. 팔팔한 청춘이 왜 적자인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자기 밥’을 놓고 설렘은 고사하고 왜 절망해야하는가?
자라는 만큼 일하기
한 사회 교육문제를 진단하자면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나는 일에 대한 관점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일이란 대학을 마치고 난 다음 취업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일은 ‘생명을 살리고 가꾸는 활동’이다. 자신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며, 더 나아가 자기 힘만큼 세상을 살리는 활동이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잘 살리고자 하는 게 바로 생명교육이다. 이는 입시경쟁교육과 아주 다른 접근이다.
일을 이렇게 ‘생명 살리기’라는 근본에서 바라보면 갓난아기도 일을 한다. 엄마 젖을 찾아 빠는 활동은 곧 아기한테는 자신을 살리는 일, 먹는 일이 된다. 아기한테는 엄마야말로 자신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아기가 자라, 기고 일어서면 아기가 하는 몸짓이 한결 많아진다.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며, 살아갈 지혜를 터득해간다.
아이가 자라면서 보여주는 몸짓은 대부분 일과 관련이 있다. 그 좋은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서울 살다가 산골에 내려와 대안학교를 만든답시고 농사를 아주 조금 짓던 해. 그 당시 우리 집 작은 애는 두 돌 정도였다. 내가 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데 이 녀석이 다가오더니 같이 고추를 따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놀랍던지! 아이는 색맹이 아니었고, 부모가 여러 고추 가운데 어떤 걸 따는 지 유심히 지켜본 다음에 붉은 것만 딴다는 걸 내게 한마디도 묻지 않고 저 나름대로 배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고, 자기 힘만큼 일을 한 셈이다.
두 돌 된 아이가 일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 기껏 고추 열 개쯤 따면 그만이다. 아이에게 일은 놀이이자 성장이며 배움이다. 푸른 고추 가운데 빨간 것만 골라 따는 건 아이 눈으로 본다면 아주 재미있는 규칙의 놀이가 아닌가.
어른이 하는 일을 곁에서 따라 한다고 하지만 아이 뇌에는 일에 대한 개념이 어른과 다르게 작용한다. 아이는 자신의 성장에 맞추는 것뿐이다. 그러니 아이가 하는 몸짓은 아이 눈으로 봐야 한다. 아이가 하는 몸짓이 이해가 안 된다면 아이에게 묻자.
자라는 아이들이 일을 자주 접하는 건 요리다. 아이들에게 먹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게 있을까. 관심이 많고 절실한 일인 만큼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어 한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쯤에 있었던 또 하나의 보기. 깍두기를 담근다고 부모가 무를 써니 아이도 해본다고 썰었다. 어른은 어른 손가락 마디만큼 썰지만 아이는 자기 손가락 마디만큼 크기로 썬다. 얼마나 귀여운 깍두기인지. 이 때의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신도 한 몫 했다는 뿌듯함과 그 사이 많이 자랐다는 성장의식도 함께 느낀다. 당연히 그 깍두기를 아이는 잘 먹는다. 자신이 했으니까! 이런 보기가 어디 한둘일까?
아이들은 자라는 만큼 일하는 능력도 늘어난다. 13살 정도면 자신이 일년 먹을 나락을 벨 수 있다. 땔감 역시 마찬가지. 이웃 한 아이는 그 나이에 자기 방을 갖고 그 방에 필요한 땔감을 손수 하고 군불도 직접 지핀다. 감성이 살아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힘들어하면 조금이나마 일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남을 돕는다는 건 나를 넘어서는 행동이다.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행동일지라도 이런 경험은 ‘쓸모 있는 사회성’을 키우는 데 밑거름이 된다.
이제 사춘기가 되면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하고, 이성한테도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로 그 이전에 친구를 그리워하는 건 대부분 어른들에 의해 ‘길들여진 사회성’ 때문이다. 온전히 자연 속에서 자라는 이웃 아이들을 보면 어릴 때 친구는 첫째가 부모요 그 다음이 형제다. 둘레 자연도 빼놓을 수 없는 친구다.) 이 역시 일로 설명할 수 있다. 일이란 먼저 자기 앞가림에서 출발한다. 생명교육에 충실한 청소년이라면 그 나이에 이미 자기 앞가림 그 이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춘기란 성 호르몬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지만, 이를 달리 보면 이제는 일하는 능력에서 자기 앞가림을 넘어서고 있다는 몸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반항이 아니라 자신을 마음껏 발산하고 원하는 친구를 찾고자 한다.
사춘기 아이는 사고도 급속히 확장된다. 여행을 알게 되고, 돈을 생각하게 되며, 더 넓은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나 아닌 새로운 친구들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한다. 경쟁 교육에서는 욕구를 지나치게 부추기는 편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끊임없이 미래목표지향으로 몰아간다. 반에서 5등하면 3등을 바라고, 일등을 하면 전국에서 일등이길 바라지 않는가. 한 칸 집에 살면서 두 칸 집을 원하고, 만원 있으면 10만원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욕구불만 상태로 만든다.
그러나 생명교육에서 욕구란 자기 능력과 함께 한다.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욕구는 먼저 본인 자신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힘 빠지는 헛된 욕구를 갖지 않는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교 나이만 되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어 이제는 필요한 만큼 독립을 해도 된다. 이 때 정도면 사실상 어른과 다름없다. 앞뒤가 이러하니 비슷한 나이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는 걸 이해하고도 남는다.
일은 종합적인 성장교육이다
자라면서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일하는 힘과 능력을 많이 잃어버린다.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몸에 배야하고, 그때마다 뇌가 따라주어야 한다. 말 그대로 일머리다. 일머리는 일하면서 자란다.
일과 접목하지 못한 배움은 배움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적지 않는 청소년들이 변비, 수면장애, 비염들을 겪는다. 관절은 또 얼마나 굳었는지, 우리 집에 왔던 몇몇 청소년은 허리를 구부려 나락을 베는 자세 자체가 안 되고, 심지어 양반 자세로 앉기조차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은 또 얼마나 불안하고 우울함에 허우적거리는가.
일은 다양한 배움과 연결이 된다. 요리를 하자면 재료와 도구를 알게 된다. 재료마다 맛과 향을 알게 되고, 다른 재료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알게 된다. 점차 실력이 늘어나면서 그 재료들이 어떤 환경에 자랐는지도 알게 된다. 비료를 준 마늘인지, 자연재배로 자란 마늘인지를 알게 된다. 음식이 약이 되는 경지를 알게 되면 주부는 더 이상 주부만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사회적 일꾼으로 거듭난다. 반면에 온갖 화학첨가제와 독소가 든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가족들에게 먹인다면 그게 일일 수 있을까.
요리하나만 해도 그 안에는 무궁무진한 배움이 들어있다. 놀이, 건강, 물리, 화학, 철학, 유통, 치유, 문학, 예술...요리를 신나게 하면 그 모든 일은 놀이다. 음식이 약이자 독이라는 말은 흔하다. 콩을 불리고 갈고 끓이는 과정은 물리화학적인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음식으로 아토피를 치유한 경험은 이제 흔하다. 음식을 만들다가 감동이 오면 시가 되고, 여기에다가 리듬과 멜로디를 넣으면 음악이 된다.
하나의 일은 이렇게 무궁무진하게 뻗어간다. 자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배움의 영역은 넓고 깊어진다. 농사 하나만 해도 그렇지 않나. 생물을 기본으로 배우다 보면 토양과 미생물 더 나아가 병해충을 배우게 되고, 천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씨앗을 갈무리하다보면 유전과 진화에 대해 알게 되고, 이는 자녀교육에 대한 깊은 영감을 준다.
또한 일은 균형성장을 도와준다. 앉아서 공부만 하면 피는 지나치게 뇌로 간다.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면 피가 온몸으로 골고루 간다. 장기적으로 보면 뇌만 발달해서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일을 한다는 건 과거 경험과 미래 꿈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거 집착을 버리게 하며, 꿈에 젖어 허우적대는 마음을 구해낸다.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출세나 돈 때문이 아니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의 생명을 잘 살리고 가꾸어 가기 위한 것이다. 자신에게 절실하고 소중한 걸 배울 때 공부도 잘 되지만 배움의 결과 역시 자신을 더 쓸모 있게 한다. 자기 스스로에게 쓸모가 있을 때 세상에도 쓸모가 있는 게 아닌가.
일은 먼 미래에 하는 게 아니다. 학벌이 더 이상 앞날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서 소중하다고 느끼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배울수록 시들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배우고 일할수록 싱그러워지는 그런 일. 일을 할수록 일머리가 좋아져 점점 할줄 아는 일들이 늘어나는 과정. 일을 통해 점점 더 쓸모가 많아지고 자아실현을 해 가는 성장. 이런 일은 아이들에게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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