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또래 교육을 넘어, 경험과 배려를 서로 배우는 어울림

모두 빛 2009. 9. 5. 08:34

                        

 

흔희 아이들에게 또래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학교 시절이라면 같이 나이 같은 학년 사이 어울리는 걸 말한다. 부모나 교사한테 배우는 것도 있지만 또래 속에서 어울리며 배우는 게 많기에 이를 강조한다. 내가 자라는 던 어린 시절에는 도시든 농촌이든 동네마다 또래가 많았고, 늘 어울리며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 또래가 많은 도시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에 매여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게 쉽지 않다. 시골은 아이들 숫자가 적어 어울리고 싶어도 환경 자체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자꾸 또래 문화를 강조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자랄 때 경험이 깔려있다. 이제는 이 또래 교육과 문화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럼, 그 대안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 아이들에게서 그 답의 일부를 얻는다. 그건 또래를 뛰어넘는 만남이자 어울림이다. 이를테면 서너 살 차이가 나는 아이들끼리도 곧잘 어울려 논다는 거다.

 

어른 상식으로는 잘 납득이 되지를 않는다. 그게 가능하냐고? 또 큰 아이들은 무슨 재미가 있으며 작은 아이들은 그런 놀이가 벅차지 않겠냐고? 물론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다. 놀이에 너무 열중하다 보면 작은 아이들은 치이고 큰 아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곳 아이들은 나이 차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틈틈이 어울린다. 이를 찬찬히 아이들 눈으로 바라보면 주어진 환경을 능동적으로 풀어간다는 걸 알 수 있다.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배려를 배우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놀이 자체가 안 된다. 작은 아이들은 강한 성취감을 배운다. 가끔은 밤에 혼곤히 잠이 들만큼.

 

이번에 우리 집에 모인 아홉 아이들도 나이 차이가 많다. 열여섯에서 열 하나까지. 어제 저녁에는 첫 만남이라 서로 친해지기 위한 자기 소개 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좀더 서로를 깊이 알기 위한 놀이로 열 다섯 살 오름이가 ‘마니또’를 제안했다.

 

이는 ‘비밀친구 또는 수호천사 놀이’로 요령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니까 모인 사람 전부의 이름을 쪽지에 쓴 다음 이를 한 사람씩 제비뽑기를 한다. 단 자신을 뽑았을 경우는 제비뽑기를 다시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뽑은 사람을 몰래(비밀로) 정해진 기간까지 도와주는 거다.

 

이 놀이의 재미는 아주 역동적이다. 자기가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도와주어야 한다. 어쩌면 그 사람을 뽑은 거 자체가 그 어떤 무의식의 끌림이 되기도 하니까. 또한 자기 비밀 친구만 잘 해줄 필요는 없다. 여러 명에게 잘 해줄수록 게임이 끝날 때까지 누구의 마니또인 지를 눈치 못 채게 하는 거다. 이렇게 하다 보면 모인 사람  모두가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형성하면서 서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비밀친구에게 잘 해주는 방식도 사람마다 아주 다양하다는 것도 매력이다. 일단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 다음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된다. 칭찬 한마디일수도 있고, 작은 선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이나 공부를 도와줄 수도 있다. 또는 비밀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단다. 이렇게 쌍방간의 관심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게 마니또 게임이란다.

 

이 놀이를 작은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 어린 친구들에게 물으니 대부분 바로 이해를 했고, 조금 어려워하는 친구에게는 한번 더 설명을 해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해서 제비뽑기를 했다. 자기를 뽑은 사람이 나와, 두 번이나 새로이 뽑았다. 또 자기가 원한 사람이 아니어서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과정들 자체가 재미있다.

 

이렇게 거실에서만 두어 시간 이야기를 했더니 조금 머리가 복잡하다. 누군가 마당에서 잠깐 몸풀기 놀이를 하잖다. 그럼, 또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어울리는 놀이를 찾자니 ‘이야기 어울림’이 먼저 필요한 거다. 그 결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정했다.

 

 

이 놀이는 얼핏 초등학교 수준의 놀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큰 아이들이 흔쾌히 하겠단다. 그 나름 짜릿한 재미가 있다고. 그러면서 탱이와 아줌마에게도 함께 하잖다. 아이들이 손을 잡아  끄니 어른 두 사람도 기꺼이 놀이에 낀다. 동심으로 돌아가는가?

 

적당히 어둑한 밤. 보름달이 갓 지난 밤인데다가 마당을 희미하게 비추는 전등불빛. 그런데도 놀이가 시끌벅적. 활기차다. 곁에서 놀이를 지켜보니 마치 현대판 무용극이나 무언극을 하는 듯 어둠 속 몸짓이 아름답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술래로 잡히는 사람이 의외로 큰 아이들이거나 어른이다. 작은 아이들이 훨씬 더 민첩하다. 몸놀림도 좋고 무엇보다 눈빛이 살아있어 잘 피하고 술래도 잘 잡아낸다. 큰 아이들은 이 놀이를 얕보다간 술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니 나이가 많든 적든 놀이 자체가 짜릿하게 굴러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또래를 뛰어넘는 만남은 서로를 더 건강하게 바르게 하지 않겠나. 어디 놀이만 그런가. 배움 역시 교과서 중심이라는 틀만 벗어나면 아주 풍부하다. 삶이 곧 교육이 되는 현장이라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부모는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얼마나 많다. 그러니 서너 살 차이끼리 어우리는 만남은 또 다른 교육이 된다.

 

또한 우리네 사회생활을 돌아보아도 그렇다. 또래끼리만 어울리면서 사회생활하는 어른들이 있을까. 자랄 때부터 또래를 뛰어넘는 어울림은 이후 이 아이들이 사회생활하는 데도 작은 밑거름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배려와 경험이 어울리는 그런 가정, 그런 사회가 요즘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