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도 끝냈겠다, 가을걷이를 다 마친 기념! 가래떡을 했다. 바람 통하는 마루에 하룻밤을 재운 다음 떡을 썬다. 떡국 떡이랑 떡볶이 떡으로.
칼로 떡을 썰다가 눈 감고 해보고 싶다. 요즘 나는 언어보다는 감각에 관심이 많다. 떡을 눈 뜨고 썰면 머릿속에는 이것저것 생각이 떠오른다. 이 생각은 대부분 언어에 근거한다. 감각은 언어에 의해서도 생기지만 언어보다 더 근본에서 일어난다. 언어를 모르는 갓난아기들도 감각은 다 갖고 있고, 동물들도 감각은 발달한 편이다.
그런데 인간이 언어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감각이 갖는 고유한 느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아니면 감각은 자꾸 뒤로 처지게 된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눈을 감고 떡을 썰어보고자 했다.
눈을 감고 칼을 드니 아무래도 손끝에 집중을 하게 된다. 손끝에 닿는 칼, 손에 닿는 말랑말랑한 떡의 감촉. 도마 느낌이 전해온다. 천천히 집중하면서 떡을 썬다. 한번 베고 손을 살짝 뒤로 밀고 또 칼로 벤다. 이 순간은 아무 생각이 없다. 오직 칼과 떡 그리고 손에 집중만 있을 뿐.
그리고는 눈을 떠 본다. 야, 생각보다 잘 된 게 아닌가! 내가 이 정도니 우리네 어머니들은 얼마나 떡을 잘 썰까. 그야말로 눈 감고 하나, 눈 뜨고 하나 크게 차이가 없을 듯 하다.
그러다 한석봉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석봉 : 어머니, 석봉이가 왔어요, 어머니!
어머니 : 그래 그 사이 글공부는 많이 했느냐?
어디 한번 보자.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써라.
잠시 후 불을 켜고.
어머니 : 이것 봐라. 애야, 네가 정말 글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한 것이냐? 이래서야 나중에 큰 인물이 어찌 되겠느냐? 도로 가거라. 제대로 한 다음에 돌아오너라.
학창 시절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눈감고 떡을 썰어보니 어머니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만에 만난 자식인데 오직 자식이 큰 인물이 되기만을 바라는 비정한 어머니. 아니, 그보다는 좀 치사한 어머니 같기도 하다 ㅋㅋ 눈감고 떡 써는 건 단순 반복하는 동작이다. 반면에 글씨는 얼마나 변화가 많나. 게다가 한자는 더 그렇다. 떡 썰기와 글쓰기는 시합 자체가 너무 불공정하다.^^
나라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글공부보다 눈 감고 떡 썰기를 먼저 가르치고 싶다. 글공부 좀 못하면 어떠랴. 큰 인물 아니고 인물이 작아도 부모 자식 사이 잘 통해서, 자라는 순간마다 행복을 누린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랴!
‘아이들이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그럴 때 별 달리 답을 할 게 없었다. 저희 인생 저희 거니까 잘 알아서 하지 않겠나 정도. 그런데 지금은 하나가 생겼다. 좋은 걸 좋다고 느끼는 감각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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