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몸 공부, 마음 이야기

[스크랩] 설거지하는 남자들

빛숨 2015. 1. 21. 22:51

다들 잘 돌아가셨나요? 우린 잘 도착했다는 안부 인사를 이 글로 대신합니다.

(사진은 분과 모임 하는 모습)

 

남자가 설거지를 한다.’ 이 건 요즘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러 남자들이 설거지를 한다고 하면 조금 달라진다. 그러니까 한 가정에서 남자 또는 남편 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한 단체에 속하는 수십 명의 남자들이 함께 설거지를 한다는 건 어쩌면 역사에 남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많고 많은 이야기와 일화를 가지는 총회에서 이번에는 설거지 하는 남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정농회 총회가 있었다. 119, 20, 21일 해서 23일 일정이다. 정농회는 바른 농사를 짓고자 하는 농부들 모임인데 올해로 40년 역사를 갖는다. 긴 총회 기간에 아이들 포함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 행사를 치렀다. 근데 사람이 많다보면 먹고 치우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사무국 제안으로 이번 총회 때 설거지는 남자(남편)들이 하면 어떠냐고 했다. 사무국에서 이렇게 제안하게 된 배경에는 정농회 안에 청년 분과의 젊은 농부들과 사전에 어느 정도 교감을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젊은 남자 농부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누가 반대를 하랴. 여성들은 입이 찢어진다.

 

첫 날 저녁, 밥을 먹고 나서 설거지 그릇이 나오기 시작하자, 청년 몇몇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말이 청년이지, 대부분 40대다. 하지만 정신 연령은 그 어느 청년들 못지않게 젊고 싱싱하다고 하겠다. 여성들(엄마들)은 오랜 만에 만난 동료, 언니, 동생들과 수다에 푹 빠진다. 물론 아이가 어린 엄마들은 아이들을 돌봐가면서. 그래도 이게 어디냐.

 

솔직히 나는 집에서 한 끼 정도는 설거지를 늘 하기에 이번 총회 때는 슬쩍 여성 쪽에 끼이고 싶었다. 집 나오면 설거지 하고 싶지 않는 주부들 심정이라고 할까. 근데 이박삼일 그 많은 설거지를 해내고 식탁을 닦는 남정네들을 보면서 적당히 빠지기에는 양심이 걸렸다. 그래서 마지막 날 마지막 점심 설거지만은 함께 했다.

 

막상 하니 할만 했다. 당번을 자발적으로 정하고, 한번 할 때마다 네 사람이 두 조로 나누어 닦고 헹구고 제자리 엎어둔다. 이 때 또 두세 명은 주방 바깥 식탁을 닦는다. 나는 얼떨결에 끼여 하다 보니 청년위원장과 한 조가 되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우린 수다를 떨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다 수준을 넘는 의견 교환을 했다. 부부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며, 또 서로 성장할 수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부부가 다시 연애하는 감정을 되살리는 관계로 거듭나자면 무얼 해야 하나? 손으로는 그릇과 수세미를 들고 일을 하면서, 입으로는 말을 하고, 가끔은 서로 눈빛을 보면서 교감을 나누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설거지가 금방 끝나는 기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새롭게 안 사실. 사무국장은 올 한 해 아내한테 밥상 안식년을 주고 있단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동안 밥상을 책임져왔던 아내를 일 년 동안 쉬게 하고, 남편인 자신이 한 해 동안 식구들 밥상을 책임지려고 한단다. 문제는 이 영감을 준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다. 지지난해 정농 생명농부학교 강의 때 내가 밥상안식년 이야기를 했더니 그 때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원망 아닌 원망의 눈빛을 보아야했다.

 

정농이란 말 그대로 바른 농사다. 근데 바른 농사는 그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되도록 화학 비료나 농약 안 쓰는 건 물론 할 수 있다면 자연 재배에 가까운 농사가 더 좋을 것이다.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좀 더 영적인 농사가 아닐까. 또한 남녀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함께 낳고 키우듯이, 부부가 함께 작물을 돌볼 수 있다면 이 역시 바른 길이리라. 작물을 함께 돌보듯이 살림을, 교육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이 역시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다 같이 설거지를 해본 이번 경험은 소중하지 싶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 안 하면 바로 표가 나지만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여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 하여, 거룩한 일이기도 하다. 근데 이 일을 이번에는 정농회에서 집단으로 해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체험은 높은 시너지 효과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체험이 널리 알려지고, 가정들이 두루 화평했으면 좋겠다.

출처 : 바른농사 정농회
글쓴이 : 모두 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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