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마무리 된 겨울이다. 메주 쑤고 김장하고 조청까지 만들었다. 겨울이면 날이 짧고 추워 하루가 금방 간다. 날이 좋을 때는 짬짬이 밭 정리도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거나 추우면 땔감하고 군불지피며 하루를 지내는 거 자체가 일이다.
하지만 밤은 길다. 나름 유익하게 보내야겠다. 올 겨울은 식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뒤늦은 공부다.
그동안 여러 해 농사를 지으면서 재배와 음식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공부를 했지만 농사의 근본이 되는 생물학 또는 식물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공부를 해보지 못했다.
세상이 점점 전문화되어 간다. 농사꾼은 한두 가지 작물을 선정하여 대규모, 기계화, 상업화하는 추세다. 한마디로 돈 되는 농사 쪽으로 흐른다. 그러다 보니 사는 재미는 적다.
예전에는 여러 가지 씨앗도 손수 받고, 작물도 골고루 심어 먹고 남는 건 파는 자급자족형이었다. 많은 일들을 손수하다 보니 삶은 고단했지만 다양한 경험이 주는 즐거움도 같이 누렸다. 요즘은 대부분 씨앗을 돈 주고 사서 심으니 씨앗을 받고 갈무리하고 가끔은 육종을 하는 즐거움조차 잃어버렸다. 이는 근본으로 들어가면 왜 사는가? 하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농사가 이렇게 단순화하는 흐름은 사회전반의 흐름과 맞물려있다. 자신이 하는 일 이외는 모두 남한테 의존하여 소비하는 흐름으로 간다. 문화 예술 그리고 자녀교육 전반에 걸쳐 삶을 재충전하고 순환하기보다 소비하는 쪽으로 흐른다.
돈벌이 농사에서 농사의 근원으로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왜 농사를 짓는가? 어떻게 짓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과연 생명을 생명답게 가꾸는가? 이런 질문들은 깊이 들어갈수록 서로 연결된다. 결과만을 목표로 하기보다 과정과 동기를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채집을 하다가 왜 농사를 짓게 되었는가. 식물과 작물은 어떻게 나누어지고 또 분류되는가? 현대 육종은 얼마나 발달했고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부분을 담당할 수 있을까? 뒤늦게 공부를 하려고 보니 읽어야 할 책이 참 많다. 식물육종학에서 토종도감에 이르기까지. 책을 보면 볼수록 알고 싶은 게 자꾸 더 많아진다. 새롭게 글을 쓰고 싶은 욕구도 새록새록 올라온다.
옥수수 하나만 놓고 보아도 공부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옥수수는 암수가 같은 그루에서 피지만 타가수정을 기본으로 한다. 따로 떨어져 한 포기만 심는다면 수정이 잘 안 된단다. 정말 그럴까? 확인해보고 싶다. 또 옥수수는 잡종 강세를 통해 육종을 해왔다. 개량종을 돈주고 사다 심으면 그해는 많이 열리나 이 씨을 받아 이듬해 다시 심으면 수확량이 크게 떨어진다. 우리는 토종 옥수수를 두 가지 심는다. 무주 검은찰 옥수수와 하얀 빛 나는 메옥수수다. 그동안은 토종을 순종으로 이어오는 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내년에는 이 두 가지 순종으로 잡종 교배를 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크세니아 현상과 잡종강세들에 대한 확인을 하면서 우리 나름의 육종의 가능성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공부가 그냥 공부에 머물려서는 안 될 것이다. 삶 속에서 다시 확인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재배 식물학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생명 사랑이다. 식물도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사람도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몸이 근질거린다. 내년 농사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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