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어 오늘도 아이들이 글쓰기 하려 왔다. 사실 나는 이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섬에서 뭍으로 나왔으니 이곳저곳 둘러도 보고 놀고도 싶을 텐데...
나는 오늘 오후부터 비가 나흘 계속 온다하기에 부랴부랴 감자를 캐서 올라온 뒤였다. 감자를 창고에 펼치고 있는데 아이들이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은 거다. 글쓰기에 대한 준비도 없이 아이들과 만나야했다. 그냥 편하게 만나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수박을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어제 했던 글쓰기 모임에 대한 소감부터 나누어보자.”
초희
“재미있었어요.”
“어떤 게 좋았어?”
“오랜만에 쓰는 거거든요.”
소똥
“집에서 혼자 쓰면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그런데요. 같이 하니까 이야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경이
“뭘 배운다는 거 자체가 재미있어요.”
하림
“머리 속에 계속 담고 있던 생각을 풀어냈더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들 좋았다니 나도 좋다. 자 그럼, 오늘 글 쓸 거리를 생각한 사람 있니?”
다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막연하다면 우리 이야기를 먼저 나누자.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다 보면 쓸거리가 잡힐 거야. 음, 무슨 이야기가 좋을까?”
다들 말이 없다.
“너희가 한창 자라니까 성장하는 이야기는 어때? 아, 나 이렇게 크는구나. 아니면 내가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라든가.”
역시나 아무도 대답이 없다.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도 크는 건데.”
“그런 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요. 오히려 살이 찐다 싶은 게 부담 되는 데요.”
“그럼, 좋아.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글쓰기가 좀더 잘 되면 그때 다시 하기로 하자. 요즘 너희끼리는 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니?”
“무서운 이야기요.”
“구체적으로?”
“귀신 이야기요.”
그 내용이 궁금하다. 초희와 소똥이는 자신들이 본 유령이나 귀신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들려준다. 나도 공감하는 바가 있어, 자랄 때 귀신불 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근데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있지만 여기서 뭔가 알맹이를 잡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한 편의 글 속에는 그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어야 한다. 귀신을 본 뒤 그 다음부터는 무서워하지 않았다든가. 또는 왜 그 순간 귀신이 나타나고 그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까지 나가주지 않으면 단순히 그냥 무서운 이야기로만 남는다. 다만 이 날 귀신 이야기를 즐겁게 하는 바람에 그 다음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술술 나왔다.
제주도 아이들끼리 뮤직 비디오 준비하는 이야기로 옮겨갔다. 준비할 게 많단다. 각자 맡은 악기도 연습해야하고, 줄거리도 짜고, 거기에 맞게 노래 가사도 맞추고, 각자가 맡을 역할도 정하고, 역할에 따라 연습도 해야 하고, 비디오를 찍을 카메라도 준비해야한단다. 편집 담당은 소똥과 초희가 맡는단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법 그림이 그려지니 좋은 글감이 되겠다.
밴드 이야기를 즐겁게 하다가 초희네와 소똥이네가 처음으로 만난 이야기가 나왔다. 근데 아이들끼리는 엄청 어색했단다. 내 귀가 번쩍 뜨인다. 내가 다시 확인을 하자, 초희가 답을 한다.
“헤어질 때 딱 한 마디 했어요. ‘안녕!’이라고.”
이어서 소똥이 입에서 만남이 있기까지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어느 정도 글감이 잡히는 듯하다. 첫 만남이 주는 어색함이라.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만 초희와 소똥이가 겪은 첫 만남은 정말 생생하다.
하림이는 무슨 글을 쓰면 좋을까? 물으니 웃기만 한다. 곁에서 지영이가 거든다.
“제는 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좀 엉뚱한 데가 있어요.”
하지만 정작 하림이는 개 이야기를 그리 할 게 없나 보다. 하림이 얼굴을 다시 보니 예전과는 참 많이 달라졌다. 지지난해인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아토피로 피부도 거칠고 코 막힘도 심했던 거 같은 데 지금은 얼굴이 깨끗하고 밝고 편안하다. 골격도 어린이티를 벗어나, 제법 청소년 티가 난다.
“하림이 스스로는 몸이 좋아진 걸 느끼니?”
“예. 초등 오학년 무렵까지는 피부가 안 좋았는데. 그 뒤부터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충분히 글감이 되겠다 싶어 물어보니 쓰겠단다.
마지막 경이
“경이는 요즘 일상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게 뭐니?”
“고양이요.”
“고양이가 좋아.”
“네.”
“어떤 게 좋아.”
“고양이 안 좋은 게 있나요? 다 좋던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경이만 아는 거지, 다른 사람은 고양이를 잘 모른다고 여기고.”
“노는 것도 자는 것도 다 귀여워요.”
경이는 고양이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다들 공책을 꺼내어 열심히 쓴다. 오늘은 시간이 정해졌다. 한 시 반 정도 밖에 여유가 없단다. 글감을 잡기 위한 이야기 나누기를 30분 정도 한 거 같다. 근데 글 쓰는 시간도 부쩍 길어진다. 어제보다 더 공들여 쓰는 지 아니면 할 말이 많아졌는지, 30분가량 걸렸다. 각자 쓴 글을 읽었다. 다들 길게 썼고, 내용도 전날보다 한결 푸짐하다. 이렇게 아이들은 적절하게 동기가 주어지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노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배움의 즐거움, 글쓰기의 즐거움은 노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을 준다. 자신이 성장하는 걸 눈으로, 글로 확인이 가능하니까. 억지 글쓰기와는 달리 자신에게 소중한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할 수 있어, 자신감을 한층 더 높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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