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스크랩]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기

모두 빛 2011. 2. 16. 06:51

아래 글은 대안교육전문 잡지인 <민들레> 이번 72호에 실린 제 글입니다. 온라인에서 다 읽기에는 좀 깁니다. 또 예전에 올린 글과 중복되는 곳도 있으니까 필요한 곳만 골라 보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기

 

(김광화 무주에서 농사일 틈틈이 글도 쓰고, 노래도 짓고, 모임도 꾸린다. 아내와 함께『아이들은 자연이다』『자연 그대로 먹어라』그리고『피어라, 남자』를 냈다.

이 원고는 2010년 12월 4일에 서강대에서 열린 홈스쿨링 심포지엄 자료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우리 식구는 1996년 서울을 떠나, 2년 정도 대안학교 세우는 일을 하다가 교육의 근본은 부모가 먼저 바로 사는 길임을 자각하고 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꾸리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홈스쿨링은 도시를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삶을 향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우리 집 아이 둘이 학교를 그만둔 지 꽤나 오래다.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일 년을 조금 다니다 그만두었고, 지금은 16살 청소년이다. 큰아이는 중학교를 두어 달 다녔고, 지금은 대학을 다니지 않고 23살 어른으로 자랐다.

 

돌아보면 삶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특히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은 엄청 다양하고, 고민의 깊이도 깊다. 이 결과물을 정리하여 우리 부부는 『아이들은 자연이다』라는 책을 냈다. 그 사이 부모인 우리 자신도 아이들도 많이 성장했다. 그리고 또 새롭게 성장하는 다른 홈스쿨링 가정이 늘어나고, 그 사례들이 책으로 간간이 엮여 나온다. 안팎의 여건이 이러하니 이제는 개별 가정의 사례를 넘어, 좀더 다른 일을 함께 꾸려도 좋지 않을까.


우리가 가진 자산이 뭘까? 

홈스쿨링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그 원리를 알게 되면 폭발적인 힘이 나온다. 홈스쿨러들의 연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홈스쿨링의 역사가 깊어지는 만큼 그 지평도 넓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산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나. 그런데 그 지평은 어디 근사한 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다. 그 하나의 보기를 들자면 이렇다.

 

큰아이가 자라면서 대학에 대한 고민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고민 끝에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어버릴 게 더 많을 것 같아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개인의 결정이 초기에는 알게 모르게 흔들린다. 가까이에서 함께 홈스쿨링을 하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잘 하다가 대학 앞에서 주춤하거나 대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일류대를 목표로 아이들을 이끌어가기도 했다.

 

분위기는 예전과 달랐다, 우리에게 대학이 멀리 있을 때는 그 회오리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근데 막상 우리 눈 앞에 닥치자 그 바람은 더 차갑게 느껴졌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싶었다. 누구나 독불장군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대학에 다니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자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 모임을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해보았다. 대학을 놓고 흔들리던 몇몇 젊은이들도 흔쾌히 함께 했고, 모임은 활기를 띠었다.

 

첫 모임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단연 대학 이야기가 많았다. 대학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대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인상 깊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젊은이 누군가가 전체 참가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가진 자산이 뭘까?”

 

보통 자산이라고 하면 통장에 쌓인 돈이나 부동산 따위를 떠올린다. 아니면 학벌. 근데 이 친구가 생각하는 자산은 바로 부모였다.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나 역시 머리가 뻥 뚫리는 걸 느꼈다. 그렇다. 아이에게 일차적인 자산은 바로 부모다. 그리고 보니 홈스쿨러가 아니라도 아이에게 부모란 가장 소중하고 자주 되새겨 보아야 할 자산이 아닐까. 홈스쿨링 관점에서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부모가 갖는 사회적 역할 또는 사회성이 자산이 된다. 홈스쿨러들은 부모가 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 아주 일찍 눈을 뜬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의 다 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엄마가 요리를 하면 아이는 일찍이 요리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보고자 한다. 부모가 교사면 아이는 가르친다는 일의 즐거움과 고뇌를 알게 되고, 가르치는 방법이나 심지어 잔소리까지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히게 된다. 컴퓨터를 많이 하는 부모를 둔 아이는 자연히 컴퓨터에 익숙하게 된다. 농사를 짓는 부모를 둔 홈스쿨러들은 일찍이 농사를 알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부모가 하는 일이 과연 사회에는 물론이고 부모 자신에게 의미 있고 보람 있으며 행복한 일인가를 자주 되묻게 된다. 부모가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직장으로서 일을 한다면 아이가 배우는 사회적 역할이나 사회성은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가 하는 일과 역할이 사회를 유익하게 함은 물론 본인에게도 자아실현이 된다면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를 배우게 된다. 이때도 아이들은 부모 역할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모 역할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이를 넘어서고자 하며, 부모 역할이 긍정적이라도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부모가 자산이 되는 두 번째는 인맥이다. 아이들이 집을 중심으로 생활하기에 부모 인맥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시시콜콜 다 알게 된다. 심지어 부모의 어린 시절 친구 이야기까지 알게 된다. 부모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자연히 이야기도 함께 나누니 부모 인맥이 아이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아이들은 부모 인맥을 선택적으로 취한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면 그림 쪽 사람을 찾아가게 되고, 출판 쪽 인맥이 필요하다면 그 인맥을 취한다. 우리 사회는 배우려고 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열려 있다. 아이들 인맥은 부모 인맥을 자산으로 해서 점차 자신들만의 인맥으로 뻗어간다. 이제 우리 부부는 거꾸로 자식들 인맥 덕을 가끔 본다.

 

부모가 자산이 되는 세 번째는 지적 자산이다. 부모가 대학을 나왔다면 아이가 대학을 나올 필요를 덜 느끼게 된다. 부모를 통해 대학에 대한 장단점을 충분히 들으면서 판단을 한다. 우리 부부가 대학 다니면서 좋았던 건 동아리나 학회활동이었다. 뜻 맞는 친구들과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토론하는 자리를 자주 가졌다. 우리는 이 경험을 살려 한동안 가족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주제는 그때그때 본인들이 하고 싶은 주제를 정해 각자 발제를 하고 함께 토론을 하는 식으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보니 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을 수 있는 지적 자산은 금세 그 바닥이 드러난다. 부모 경험이란 이미 지난 시절의 것이고, 몇 십 년이 지난 뒤인 오늘날의 지적 자산은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넘어서는 건 아이들 몫이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대학에서 배울 내용으로 한동안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다음으로 경제적 자산이다. 경제적 자산이라고 할 때 부모가 돈이 많으냐 적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빚이 있느냐 없느냐다. 빚이 있어 돈에 쪼들린다면 아이에게 그늘을 안겨줄 가능성도 높다. 빚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 경제적 자산은 든든하다. 학교에서는 부모 직업이나 재산을 서로 견주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강하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배울 때 아이들은 여간해서는 제 부모를 다른 부모와 견주지 않는다. 이것만 해도 홈스쿨링은 그 지평이 무한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렵다면 한 푼이라도 부모를 돕고자 한다. 부모가 아프다면 정성을 다해 돌본다. 부모가 솔직하기만 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다. 아이 자신의 행복은 부모 행복과 분리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자산이 있는데 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부모가 영화를 좋아하면 아이도 그렇고, 부모가 기타를 즐겨 치면 아이 역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마냥 부모의 문화적 자산에만 맴돌지는 않는다. 우리 부부는 전혀 피아노를 칠 줄 모르지만 아이들은 제 친구들 영향을 받아 피아노를 즐긴다. 다만 이를 자산으로 이야기하는 건 문화적 갈증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걸 골고루 접해도 그것이 자기 것으로 소화되지 않으면 갈증이 된다. 반대로 자신과 가족이 가진 문화적 자산을 충분히 수용한다면 그 갈증은 현저히 줄어든다. 여기서도 조금 더 나아간다면 문화를 소비하는 흐름에서 벗어나 창조하는 쪽으로 고민을 하기도 한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모라는 일차 자산에 대해 우리들이 너무 무지하거나 무시해 왔다는 점이다.

 

홈스쿨러들의 연대라는 것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 그게 바로 연대의 시작이자 어떤 점에서는 전부일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보다 더 시급한 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홈스쿨링을 안 해도 좋다. 다만 모두가 너무나 소중한 자산을 곁에 두고도 모르는 홈맹(Home盲) 만은 벗어나자.


부모 울타리 넘어서기 

아이들은 부모를 자산으로 해서 자라다가 부모 울타리를 넘어설 때가 온다. 보통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는 아이를 나이에 맞추려 한다. 그러나 아이마다 그 고유한 개성에 초점을 맞추는 자연주의 생명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를 넘어서는 때라는 게 아이마다 다르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갓난아기라면 엄마만 곁에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 제 발로 일어서게 되면 활동범위도 넓어진다. 이때는 아무리 멀어도 엄마를 부르면 찾을 수 있는 거리까지만 나아간다. 낯선 곳에 가면 엄마 치마폭을 잡고, 둘레를 충분히 살핀 다음 아이 안에 믿음이 설 때 움직인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 울타리를 넘는 건 부모 철학과 부모가 처한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자연에서 온전히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사춘기까지는 그리 친구를 필요치 않는다. 어쩌면 또래 친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환상 또는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둘레 모든 아이들이 어딘가로 날마다 몰려가는 일상을 지낸다면 아이한테 혼자서 고요히 지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된다. 반대로 고요한 곳에서 아이가 자란다면 괜한 불안감으로 쓸데없이 자꾸 또래와의 만남을 부추길 필요는 없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부모 울타리를 넘고자 할 때 그 동기가 무엇이든 아이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 자신의 성취동기를 넘어, 어른 누군가가 부추긴다거나 교육 문화적 환경이 유혹적일 때는 이러저러한 함정이 도사린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설 때의 동기는 다양하다. 그 첫째는 제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자산을 웬만큼 소화한 상태가 된다. 부모가 갖는 장단점 가운데 장점을 웬만큼 받아들이면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서는 건 축복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아이들은 부모 자산과 장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에 맞닥뜨리게 된다. 신발 한 켤레, 가방 하나조차 그러하지 않는가. 그러다보면 부모 단점에 먼저 눈을 뜨게 되고, 부모 잔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부모 자식 사이 믿음의 고리가 생기기도 전에 겪어야 하는, 새로운 자극은 그나마 남아 있던 부모 자식 사이 믿음의 끈마저 놓아버리게 한다.

 

이렇게 신뢰에 금이 간 첫째 요인은 대부분 부모 잘못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았는데 등을 떠미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이가 유치원 나이 때쯤인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 적이 있다.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가보는 곳이고, 많이 보아두는 게 좋다고. 근데 그 복잡한 동물원을 다 둘러보고 나서, 아이에게 소감을 묻자,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응, 나는 엄마 잊어먹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아내가 원했던 건 시간 내고 돈 들인 체험학습에 대한 성과였다. 그런데 이 얼마나 큰 간격인가. 아이가 원하기보다 부모가 원해서 아이 등을 떠밀고, 아이 손을 이끌어 간 보기가 된다. 아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런 보기는 무수히 많지 않겠나. 단계별 학습이나 또래 문화 또는 경쟁 문화에 익숙한 부모 세대는 두려움이 많다. 그 두려움을 아이에게 전가하게 된다. 부모가 갖는 긍정적인 자산보다 부정적인 자산을 본인도 모르게 아이에게 물려주게 된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제 발로 부모 울타리를 넘어선다. 부모 울타리를 넘어 자극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온다. 인터넷이나 방송 언론 따위에 온갖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자신만 열려 있으면 새로운 세계는 널렸다. 산골에 살더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러저런 인연들은 많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할 때 흔들리면서 고뇌하면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나가느냐다. 선택의 자유와 배움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며 성장하지 못한 많은 아이들은 선택 자체를 어려워한다. 이 역시 얼마나 큰 불행인가.


(대)학교를 넘어 서기 

홈스쿨링은 학교를 벗어나 가정을 중심으로 배우는 거다. 여기서 학교는 대학교까지를 말한다. 적지 않은 가정들이 홈스쿨링을 선택할 때 마지막 지점이 대학이 되곤 한다. 잘 하다가도 대부분 대학 앞에서 주춤한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일자리에 대한 전망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홈스쿨링의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단연 아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대학 역시 이런 교육철학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등하교, 학비, 짜여진 커리큘럼, 학점, 스펙 쌓기…. 얼마 전에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고 했던 <김예슬 선언>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본다.

 

대학 문제를 넘자면 일에 대한 철학과 그 선택에 일찍이 눈을 떠야 한다. 일은 공부를 다 마친 다음에 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마친다’는 말 자체도 잘못이지만 학업을 마치고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한다는 생각 자체에는 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일과 일머리 그리고 일자리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일이 막연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부분이다.

 

아이들에게 배움은 곧잘 놀이자 일로 연결이 된다. 가장 쉬운 보기가 요리다. 누구나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관심 분야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지내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어지는 게 공부보다 음식을 차려 먹는 거다. 이는 원초적 행복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이런 관심과 욕구를 부모가 내치지 말고 잘 살릴 때 홈스쿨링은 그 가능성과 여유와 즐거움과 성취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나비효과를 실감한다.

 

큰아이는 만 17살부터 손수 음식을 차려 먹는 이야기를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다. 아이다운 발상과 이야기여서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거기에 힘을 입어 3년을 연재했고, 이를 묶어 『열두 달 토끼밥상』이라는 어린이 요리책으로 출간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큰아이는 틈틈이 그림에도 관심을 갖더니 올 초에는 아내가 낸 책 『자연달력 제철밥상』에 삽화를 그려냈다.

 

작은아이 역시 본인의 호기심과 배고픔 그리고 집안 분위기 영향을 받아 곧잘 요리를 한다. 지난 한 해는 나와 아이들이 힘을 합쳐, 아내에게 ‘밥상 안식년’을 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요즘 우리는 하루 두 끼를 먹는데 올해는 네 식구가 둘씩 짝을 지었다. 아내와 아들이 아점(아침과 점심)을, 나와 딸이 점저(점심과 저녁)를 맡아 하루를 해결한다. 함께 밥을 짓고 먹으면서 자연히 식구 사이에 소통이 깊어질밖에.

 

이렇게 일은 거창한 그 무엇에서 오는 게 아니다. 배움이 배움으로 머물지 않고 곧장 일로 넘어가는 훈련이야말로 자신의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하는 힘으로 자란다. 소설을 즐겨 보던 아이는 자연스레 자기 소설을 쓴다. 딱히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렇게 재미삼아 하다보면 실력이 부쩍 늘게 된다. 인문학을 즐기는 친구는 처음에는 그냥 즐거움으로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빈자리를 발견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인문학자가 되고자 한다. 또 다른 이웃 아이 하나는 일곱 살에 엄마가 동생을 임신하자, 이를 일 년 동안 그림으로 그려 그림책으로 낸 바 있다. 이런 사례를 찾아보면 아주 많다.

 

또한 일과 관련해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갈 부분은 공부와 관련된 부분이다. ‘해야 하는 공부’를 오래 하다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역시나 ‘해야 하는 일’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위와 똑같은 내용이라도 아이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공부’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본 대로, 배움과 일은 분리되지 않을뿐더러, 기쁘게 성장한 사람이 일을 기쁘게 하는 건 자연스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렇게 배움이 곧 일이 된다는 자각과 경험이야말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늘리는 역할을 단단히 한다. 다만 이 일은 우리 부모 세대가 바라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우리 세대는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한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회에 유익한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니 대학을 마친 다음 직장을 잡고 일을 하는 순서를 따르기보다 일에 대한 총체적인 자각을 하는 게 바로 대학 문제를 푸는 지름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기 

아이가 자신이 주도해서 배우고 또 성장하다 보면 부모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그저 아이 곁에 있어주는 정도. 좀더 잘 하려면 부모 자신이 제 앞가림 잘 하고, 자식에게 불안감을 물려주지 않으면 된다. 좀더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이들 덕분에 부모 역시 자극을 받고 많이 성장하게 된다. 한마디로 ‘자식 덕 보기’가 일상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부모 역할도 달라진다. ‘사회적 부모’로 조금씩 자리매김한다고 할까. 사회적 부모! 내 자식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 아이들’이라는 자각으로 나아가는 걸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해줄 수 없는 많은 것을 다른 어른에게서 배운다. 그 덕에 아이들이 사회에 쉽게 뿌리내린다. 이렇게 아이가 제 발로 찾아간 어른들은 학교 다닐 때 선생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무런 대가 없이 기쁘게 가르쳐준다. 그러다 보니 새삼 나 자신의 부모 노릇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내 아이가 나 아닌 다른 부모(어른)를 찾아간다는 건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집 아이가 내게 온다는 것과도 같은 이치가 된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아이를 다 내 자식으로 할 수는 없다. 이때 역시 아이가 고리가 된다. 아이가 부모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그 친구는 역시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나간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크게 부담이 없다. 그저 우리 아이 친구들이 오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야기 들어주며 함께 일도 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정도라고 할까.

 

한 가지 보기를 들자. 우리 작은아이 친구인 열다섯 살 근이(가명)는 대도시에 산다. 올해 초, 수업시간에 뺨을 맞고 학교를 벗어났는데 부모가 맞벌이를 하니 아이 혼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초기에는 견디기 어렵다. 아이와 부모 모두가 그렇다. 고민 끝에 우리 집에 와서 열흘 정도 지내 보고 또 몇 달 있다가 다시 보름 정도 있다 돌아갔다. 물론 이 아이는 우리 집에만 온 건 아니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 집을 찾아가서, 필요한 만남과 소통을 하면서 몇 달 사이 부쩍 자신을 추슬러냈다. 이럴 때 작은 힘이지만 손을 잡아줄 어른들이 필요하지 않겠나. 개별 가정으로서는 한계가 많기에 앞선 경험을 가진 부모들의 사회적 역할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홈스쿨링을 해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개별 가정의 특색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 부모가 어떤 환경과 어떤 철학을 갖느냐에 따라 자녀가 무척 많은 영향을 받는다. 때로는 이런 영향이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흔들리는 부모(단체 포함) 같은 경우는 그 흔들림과 그늘이 아이한테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런 흔들림 때문에 아이를 지원해주지 못하기도 하고, 자신감 부족으로 중간에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립 또는 방어적으로 자녀교육을 풀어가는 집들도 있다. 이를테면 원하지 않는 사회적 영향에 아이가 노출되는 걸 극히 꺼린다고 할까. 그러다 보면 자녀와 알게 모르게 엎치락뒤치락하기 마련이다.

 

이제 홈스쿨링의 역사와 경험이 쌓여가는 만큼 이런 시행착오를 줄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서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 각자 조금씩이나마 사회적 부모로서 자리매김해 간다면 우리가 실현해야 할 그림이 한결 뚜렷해지리라 믿는다. 홈스쿨링 일세대들이 하나둘 어른으로 자랐다. 곧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키울 것이다. 이들의 자녀교육 방식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펼쳐지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 되는 마음이란 얼마나 설레는 마음이었던가. 내 아이와 네 아이를 나누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른들. 그런 사회적 부모로 거듭나는 것 역시 설렘이어야 하지 않을까.


경쟁을 넘어, 나눔과 연대로 

개별 가정의 울타리를 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가장 쉽고 역동적인 건 바로 아이들이 스스로 꾸리는 모임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소중하고 절실한 관심사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작은아이가 하는 청소년 모임은 이제 이태가 됐다. 점점 모임이 커져 더 이상의 친구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이고, 분화될 조짐마저 보인다. 모임 방식은 회원들 집을 돌아가며 모임을 하고, 평소에는 인터넷 카페로 소통한다. 중간마다 몇 명씩 정모도 한다. 모임은 완전히 자치적이다. 집을 빌려준 어른들이 지켜보거나 차량 서비스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밥해먹기부터 시작해 모든 프로그램을 자기들이 의논해서 꾸린다. 아주 재미있는 한 가지는 ‘자발적인 숙제’다. 자신이 발표하고 싶은 내용(기타 연주, 피아노 연주, 빵 만들기, 만화 그리기 등)을 스스로 정하여 모임 때 발표한다.

 

대학 문제를 넘어서는 모임이면서 자유와 자립을 지향하던 20대 전후 청년들의 모임은 3년 정도 이어지다가 지금은 발전적인 분화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주도하는 모임의 장점은 참 많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다 열거하기 어려우니 생략하겠다.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보인다. 우선 여자 열에 남자는 서넛 정도인 남녀 비율. 그 이유가 뭔지를 대강 감은 잡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여자들은 관계 중심, 남자들은 일이나 목표 중심이라고만 해두자.) 다음 과제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모임도 시너지 효과를 가지며 성장하는 데 어디로 어떻게 발전할지 감조차 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부모 역할은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부모 모임은 개별 부모들의 여건(시간이 없고 공간이 떨어져 있고 철학이 다른 점)과 절실성의 부족으로 잘 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좀더 넓게 바라본다면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본다. 개별 가정이 자녀에게 투자하는 돈과 시간과 열정의 일부만 투자한다면 부모 모임은 훨훨 날 수도 있으리라.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하는 모임도 가능하다. 홈스쿨링은 개별 가정 안에서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이런 힘을 몇몇 그룹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다양한 그룹 홈스쿨링과 연대도 가능하지 않겠나. 그 밖에 좀더 넓은 연대도 가능하리라 본다.

홈스쿨링 가정은 그 부모와 아이마다 개성이 뚜렷하여 쉽게 연대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떤 점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배우는 힘이 커질수록 남과 나누고 연대하는 힘도 커진다는 게 내 경험이다. 나무마다 제 빛깔이 뚜렷하여 아름다운 숲이 되듯이 배움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면서 더불어 숲이 될 때 나무마다 갖는 그 고유한 아름다움과 쓸모가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출처 : 홈스쿨링 가정연대
글쓴이 : 아이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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