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사는 하늘이가 어제 이어 오늘도 우리 집에 왔다. 하늘이는 여섯 살 여자 아이. 호기심이 왕성해서 궁금한 게 많고 뭐든 해보고 싶어 한다. 어제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집 안을 둘러보더니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걸 바로 알아낸다.
“이게 뭐예요?”
“응, 그거 색칠 공부하는 거.”
“이거 제가 하면 안 돼요?”
“응, 해도 돼.”
그러자 그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색연필은 어디 있어요?”
“언니한테 물어봐.”
언니한테 쪼르르 달려가더니 드디어 색연필을 얻어 와서 그림을 그린다. 조금 그리더니 언니에게 착 달라붙어 말을 시킨다. 거절하기 쉽지 않다. 탱이가 곁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수다를 떨어준다. 이렇게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걸 자연스럽게 손에 넣는 힘이 있다.
오늘도 하늘이가 왔다. 어제 했던 그림 그리기를 하더니 다시 아내 곁으로 온다.
<“뭐해요? 왜 하는데요? 먹을 거 없어요?”>
“아줌마, 뭐해요?”
“응, 글쓰기.”
“왜 하는데요?”
아내가 글쓰기에 집중한다고 대답을 하지 않자, 큰 소리를 낸다.
“아줌마! 왜 대답을 안 해요!”
마치 말 안 듣는 아이 나무라듯 한다. 호기심이란 그때그때 충족되지 않으면 참기가 어렵다. 욕구 불만이 생긴다. 아이가 산만하게 바뀌거나 침묵으로 빠져든다.
“응, 이거 꼭 해주기로 약속을 했거든.”
“누구랑요? 아줌마 친구랑 약속이에요?”
집요하게 묻는다.
“네? 네?”
이쯤 되면 호기심을 넘어 어지간하면 자기랑 놀자는 수작이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작전을 바꾼다. 아내한테 찰싹 달라붙으며 대화거리를 달리한다.
“언니는 어디 갔어요?”
“응, 서울.”
“서울은 왜요?”
“그건 언니한테 물어봐야지.”
그러더니 이번에는 내 곁으로 온다. 말을 하면서 점점 내 안쪽으로 파고든다.
“나도 컴퓨터 하고 싶어. 아저씨 나도 하면 안 돼요?”
“아저씨도 잘못해. 자주 망가뜨리는 걸. 그럼 언니가 고쳐주니까 미안하지.”
“나도 하고 싶다. 하고 싶어.”
그래도 내가 반응이 없자, 안 되겠다 싶던지 이번에는 내 곁에 있는 연필을 쥐어든다.
“이거 써 봐도 돼요?”
“응, 무얼 쓰고 싶은데?”
“엄마 이름.”
“아빠 이름은?”
“잊어먹었어요.”
왼손으로 연필을 잡더니 엄마 이름을 쓴다. 그림 그리듯 글씨를 쓴다. 그리고는 내 등 뒤 벽장을 만진다.
“여기 열어봐도 돼요?”
“응.”
“한복이 있네요. 누구 거에요?”
대답을 안 하자 계속 답을 채근한다.
“네? 네?”
아이가 옆에서 자꾸 말을 시키니 나 역시 집중이 안 된다.
“하늘아, 혼자 놀면 안 되겠니? 지금 아저씨 아줌마는 좀 바빠.”
“저 혼자 노는 거 잘 못해요. 아저씨는 잘 해요?”
“응, 사람은 혼자서도 잘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해.”
“에이, 아저씨 지금 저한테 장난치는 거지요?”
더 이상 대꾸를 안 하니까 저대로 논다. 연필로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뚱땅거리고. 그러다가 한동안 조용하다. 내가 불안하다. 궁금해서 몰래 보니까 상상이 방에서 이것저것 가지고 혼자서 논다. 물놀이 하는 튜브를 가지고도 한참을 논다. 그러더니 또 말을 한다.
“먹을 거 없어요?”
“떡 있어.”
어제 먹다 남은 상상이 생일 떡이 있기에 주었다. 조금 먹더니 또 한 마디.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요?”
그러자 아내가 말을 받는다.
“여보, 오늘 점심은 당신 차례네.”
“어, 내가 왜?”
“탱이가 서울 갔잖아요?”
<“처음 한번 해본 건데요. 뭘”>
그러자 하늘이가 바로 말을 받는다.
“아저씨가 좀 해요.”
“어라, 네가 왜 아저씨에게 명령을 하니?”
“제가 하면 안 돼요?”
“생각을 해봐. 네가 어찌 아저씨에게 명령을 할 수 있니?”
“에이, 처음 한번 해본 건데요. 뭘”
졌다. 아이를 못 당한다. 잠깐만 생각해도 하늘이 마음이 이해가 된다. 집에서도 아이들은 걸핏하면 심부름이란 이름으로 부모나 언니오빠 명령을 받는다. 우리 집에 온 잠깐 사이에도 여러 번 명령을 받았다. ‘오빠 물건은 만지면 안 돼. 컴퓨터가 망가지니 만지지 마! 혼자 놀아!’ 그러니 아이가 한번쯤은 어른에게 명령한다고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겠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은 ‘부부 싸움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곧잘 했었다. 이건 분명 어른 잘못이기에 아이들이 명령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늘이 명령은 어른 잘못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걸 명령한 거다. 살짝 뒤통수를 맞은 듯 느낌이 묘하다. 결국 내가 점심을 하기로 했다.
“여보, 검은 쌀 어디 있지요?”
“냉장고에.”
그러자 또 하늘이가 묻는다.
“검은 쌀이 뭐예요?”
“검은 쌀이 검은 쌀이지. 흰쌀 말고 검은 쌀!”
눈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와, 신기하다. 우리는 없는데.”
내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하늘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마늘 까기다. 아이 의사를 물어보니 다섯 알을 까겠단다. 열심히 깐다. 뿌리 부분을 칼로 도려내는 건 우리 집이랑 조금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러면서 어찌어찌 점심을 다 한 다음 아내랑 하늘이랑 셋이서 함께 먹었다. 탱이는 서울 가고 상상이는 마을 가고 없다. 우리 아이들은 없는데 어린 아이 하나랑 먹고 있으니 마치 우리 부부가 노년에 손주 봐주는 그런 기분이다.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손주. ㅋㅋㅋ
점심을 먹으면서도 아이는 쉴 사이 없이 수다. 내가 점심 먹고 나서는 집수리 일을 한다니까 궁금해 한다. 흙으로 틈새를 매우는 일이라 했더니 저도 하겠단다. 정말 놀라운 호기심이다. 그것도 빨리하고 싶어 밥을 먹자마자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단다. 설거지하기 좋게 의자를 갖다 주자, 제법 자세가 나오면서 설거지를 다 한다.
“이제 일하러 가요, 아저씨.”
겨울 추위를 대비해서 집 외벽 틈새를 흙으로 메우는 일. 흙을 준비하고 물이랑 잘 이겨 틈새를 메운다. 내가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는 따라한다. 계속 수다를 떨면서 일을 한다. 꼬마라고 보기에는 제법 일을 하는 편이다. 한 5분쯤 지나자, 내가 하는 일 속도가 저보다 빠르다는 걸 아이가 눈치 챘나 보다.
“아저씨가 나보다 잘 하네요.”
“헐! 나는 어른이잖아? 이런 일을 너보다 많이 해 보았지. 너보다 힘도 좋고.”
“어른이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어른이 잘 못하는 일도 있어요.”
“그게 뭔데?”
“애 보는 일은 못하던데요.”
한 10분쯤 하더니 다시 오겠단다. 이렇게 하늘이는 얼추 세 시간 가량 우리 집에 머물며 온갖 수다에 온갖 놀이와 온갖 일을 했다. 그림 그리듯 글쓰기, 색칠하기, 피아노 뚱땅거리기, 벽장 살피기, 검은 쌀 보기, 마늘 까기, 설거지, 흙 메우는 일, 수다 떨기. 그리고 보니 ‘어른에게 명령하기’도 있다. 호기심이 살아있는 아이들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세상을 겪고 또 배운다. 이를 곧바로 자기 힘으로 만든다.
해거름에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솔직히 내 속이 후련했다. 아이 에너지를 고스란히 따라가자면 어른은 가랑이 찢어질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호기심 덩어리. 생명력 그 자체다.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를 가두거나 억누르지 않고 누가 제대로 살려서 키워낼 것인가?
'살아가는 이야기 > 아이들은 자연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읽는 재미, 따라하는 재미가 있는 책 - 열두달 토끼밥상 (0) | 2008.09.22 |
---|---|
새롭게 만들어본 개념, ‘아이른’과 ‘어른아’ (0) | 2008.08.25 |
아기에게 배우는 운동, 기지개 (0) | 2008.08.17 |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정농(正農)을 위해 (정농소식지) (0) | 2008.08.13 |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아이들 (0) | 2008.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