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가 점점 불안해지는 세상이다. 우리 몸이 되고, 생명이 되는 먹을거리가 불안하다니……. 뭔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생명의 가치가 돈의 가치에 짓눌려 헐떡이는 꼴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른 먹을거리는 바른 농사에서 나온다. 바른 농사란 바로 정농(正農)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이 바른 농사인가라고 다시 묻는다면 사람마다 그 답이 다를 듯 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짓는 농사도 정농이라고 생각한다. 농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게 있다. 요즘 농촌에 젊은이들이 거의 없다는 슬픈 현실을. 어쩌다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있지만 전체 농사꾼에 견주면 이는 ‘새 발의 피’다. 수천만 도시사람들의 밥상을 노인들이 책임지는 구조가 아닌가.
우리 정농회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는 거 같다. 내 나이 쉰 살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청년 정농’이다. 청년 정농은 정농회 안에 젊은이들 모임인데 실정이 이러하다. 그나마 이번 청년 위원장이 30대 나이라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정농회부터 젊은이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다. 정농회 연수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부모 따라 연수에 오는 아이들은 나이가 어리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그 이후부터는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익힐 만하면 보기가 어렵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대학을 다닐 나이가 되어도 그렇다. 정농회에 청소년이 거의 없다. 연수회 갈 때면 이 부분이 아쉽다. 보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랑 함께하면 좋지 않겠나. 일도 함께 하고 공부나 연수도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공부, 더 즐거운 축제가 있을까?
<진정 바른 삶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 전정 바른 삶이라면 우리 아이들도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내 경험을 말하자면 아이들은 일이 즐거워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일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 믿는다. 되도록 하고 싶은 일만 하게 한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하고 싶은 일도 늘어난다. 농사일만이 아니라 요리도 하게 되고, 집짓기도 하며, 손님맞이도 한다. 지난해 우리 집 모내기는 학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우르르 와서 함께 해냈다. 또 이 아이들이 수맥 보는 법을 배우겠다고 화천에 사시는 임락경 회장님 댁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올해는 우리 아이들이 부쩍 농사일에 흥미를 갖는다. 나와 함께 논농사 전 과정을 함께 해 보겠단다. 그래서 올 봄부터 왕겨훈탄 만들기부터 퇴비 만들기, 논두렁하기, 볍씨 침종과 모내기에 이르기까지 다함께 했다. 물론 그 일을 하기 전에 이론 공부도 함께 했다.
큰 아이는 이제 젊은이들과 교류를 적극 원한다. 지난여름 정농회 연수 때는 큰아이랑 함께 갔다. 그런데 아쉽게도 계속 참여하고 싶지는 않단다. 그 이유는 또래 젊은이들이 너무 적었고, 이야기가 어른 중심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올해 큰아이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 귀농 2세들 모임을 꾸렸다. 필요하면 뭐든 심고 가꾸듯이 모임도 그 힘으로 꾸린 셈이다. 4월 첫 모임에는 열입곱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 열명 정도 모였다. 여기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대학이 얼마나 삶을 소비하게 만드는 지 또 대학을 다니 않으면서 삶의 전망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한 친구는 이런 말도 했다. ‘대학 갈 돈이 있으면 내게 현금으로 주면 좋겠다.’ 이 말은 대학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대학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그만큼 배우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다. 맞춤 교육을 위해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싶단다. 또한 모임을 되도록 자급하기 위해 돈을 어찌 벌 것인가도 진지하게 고민을 나누었다. ‘음식 페스티벌을 하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잡지를 만들자. 문화공연을 하자...’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을 풀어내면서 힘을 모은다. 그리고 6월에 두 번째 모임. 함께 할 일을 구체화시켜나간다.
학교 교육을 받을수록 불행하게도 흙과 멀어지는 게 아닐까. 심지어 농업 계통의 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대부분 사무직이나 연구직에 종사하는 경향이 있다. 따지고 보면 학교라는 틀 자체가 철 따라 사는 걸 어렵게 한다. 자연의 리듬을 따른다면 여름은 새벽같이 일하고 뜨거운 한낮은 쉰다. 겨울은 느지막이 일어나고 활동을 적게 하는 계절. 그러나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오고간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 자연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학교 흐름을 따르게 된다. 조금씩 자연에서 멀어지고 부모 삶을 등지기 쉽다.
<어려움보다 기쁨을>
임 회장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사람이 자기 먹을거리를 하는 데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봉사하는 삶을 살면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본다. 물론 처음부터,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어릴 때부터 뭐든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의식적으로’ 키워갈 때 가능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아이들 자라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작은 아이는 두 돌 무렵 내가 고추를 따고 있는 데 아장 걸음으로 와서는 붉은 고추를 따는 게 아닌가. 아이는 어떤 걸 따야하느냐고 내게 묻지도 않았다. 그냥 부모가 하는 걸 곁에서 보더니 푸른 고추 가운데 붉은 걸 골라 따는 걸 ‘보고 배운 것’. 네 살 무렵에는 당근을 캐겠다고 힘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참깨를 털면서 재미있다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아이들은 재미로 일을 하다가 힘들거나 지겨우면 훌쩍 자리를 뜬다. 이럴 때 부모가 억지로 아이를 잡아두어서는 안 된다. 잘 했다고 수고했다고 격려를 해 주면 된다. 아이들에게 농사는 누군가를 뒷바라지 하는 게 아니라 제 앞가림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무리하게 일을 시키면 부모 삶을 외면하거나 부모를 떠나고 싶어 한다.
반면에 아이가 자라면서 먹을거리를 자급할수록 자부심도 커진다. 먹고 사는 일보다 더 근본의 일이 있을까. 근본을 기쁘게 할 때 여기서 뻗어가는 삶의 갈래도 기쁠 수밖에. 요즘 큰 아이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하던 <토끼 밥상>이라는 걸 묶어 책을 내고자 땀 흘린다. 그렇게 하다가 몸이 찌뿌듯하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논두렁에 나가 낫으로 풀을 깎는다. 하루에 한 두 시간 남짓. 여러 날에 걸쳐 그 일을 한다.
농사만 바르게 해도 여기서 뻗어가는 일은 정말 많다고 나는 믿는다. 정농회 역할도 이제 농산물만을 나누는 데서 벗어나야하지 않을까. 바른 먹을거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을 나누고, 논밭과 곡식에게서 깨닫는 삶의 영성을 나누는 것이며, 또한 먹을거리가 약이 되는 의술을 나누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바른 삶이란 바른 먹을거리와 결코 뗄 수 없는 세상. 먹을거리가 불안한 세상일수록 정농도 빛이 난다.
나는 아이들과 농사일을 함께 하면서 무엇이 더 올바른 농사인지를 계속 고민한다. 바른 농사, 그 시작은 말할 수 있지만 그 끝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더 높은 정농’을 향해 나간다면 세상은 믿음과 사랑으로 빛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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