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자연과 하나 되기

남자도 수다를 떨고 싶다

모두 빛 2008. 8. 8. 11:16
 

남자도 수다를 떨고 싶다. 그런데 나는 수다 떠는 법을 잘 모른다. 아니, 잃어버렸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랬던 거 같다. 내가 어린이 때 밖에서 동무들과 실컷 놀고 들어오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상대는 어머니. 어머니가 늦은 저녁을 한다고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으면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어졌다. 아마 교육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한다’는 교육.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또래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다. 남자가 말을 많이 하면 ‘가볍다’든가 ‘너무 촐삭된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은 ‘그럼, 못 쓴다’이다. 학교 다니지 않는 상상이랑 여기 이웃 아이들을 보면 남자 아이들도 무척 수다스럽다. 

 

수다를 떨자면 말뿐이 아니라 감정도 중요한 고리. 남자가 감정을 표현하는 건 말보다 더 어렵다. 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가운데 화내는 것만 많이 배운 것 같다. 기쁨이나 슬픔에 대해서는 이를 표현하기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려야했다. 슬픔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감정은 울음이다. 울음이 나오면 무조건 참아야 한다. 자라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이 말을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들으면 꽤나 근사한 말이다. 그러나 슬픈 현실을 마주하고서 울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건 비극이다. 그래도 울음이 나오면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흘려야 한다는 식으로 알게 모르게 교육을 받았다.

 

수다란 국어사전에도 좋은 이미지가 아닌 걸로 나온다.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 과연 쓸데없는가? 나도 한동안 아내가 같은 여자들과 수다를 떠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누군가와 전화로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30분은 기본. 그냥 내버려 두면 한 시간이 넘어갈 때도 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부산에서 온 전화를 아내가 받더니 30분이 넘어가자 상상이가 곁에서 그런다.

“이제 그만 좀 해요.”

 

그런데도 한동안 ‘깔깔 호호’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자들끼리 하는 수다의 참맛을 잘 모른다. 하지만 부럽다. 그렇게나 서로가 ‘주고받는 말’이 많다는 게 부럽다. 누군가와 곁에 있으면서 서로 통하는 말이 없을 때 얼마나 답답한가. 비슷한 또래 남자들끼리 있을 때 이런 현상은 더 심하다. 이를테면 명절 때 친지들과 만나면 참 난감하다.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통하는 구석이 별로 없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사실 이외에 공통점이 별로 없다. 안부 인사 한두 마디 나누면 뻘쭘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정치나 경제 이야기 해보았자 얼마 가지 못한다.

 

여기 견주어 여자들은 수다를 잘 떤다. 여자 동서들끼리는 부모도 성장과정도 전혀 다른데도 이야기가 통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남자와 여자를 크게 나눈다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관계 지향적이다. 남자들은 일 중심이다. 그것도 자신이 하는 전문적인 일 중심. 전문 일을 벗어난 이야기에 대해서는 남자들끼리는 할 이야기가 없다. 전문성이 높을수록 이야기는 강의 형식이 되곤 한다. 서론이 있고 본론이 있으며 결론을 맺어야 한다. 이나마 논리가 분명한 건 참고 들어줄만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장광설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횡설수설 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그리고도 더 심각한 건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는 사실. 나는 이따금 아내가 내게 눈치를 주고, 어깨를 밀치고, 그만하라고 충고를 해서야 그치곤 했다.

 

수다는 그런 게 아니지 않는가. 나도 잃어버린 수다를 되찾고 싶어 혼자서 생각을 많이 했다. ‘수다를 떤다’고 한다. ‘떨다’는 흔들림, 진동이다. 한쪽이 막혀있거나 굳어있다면 떨림은 없다. 수다는 서로 주고받는 울림이다. 혼자만의 넋두리나 잘난 강의가 아니라 눈빛을 마주하고 감정에 공감하며 이야기 꼬리에 새로운 꼬리로 뻗어가는 생명력이다. 나무나 곡식이 땅 속으로 뿌리내리듯 뻗어가는 그런 생명력. 떨림이 없는 수다는 소음일 뿐이다.

 

남자들끼리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고 쉽게 하는 게 술 마시기. 외부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억지로 억눌려왔기에 이를 풀자면 역시나 외부에서 술과 같은 자극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술을 마시면 억압된 심리가 풀어지면서 조금 부드러워진다. 약한 모습이랄까 속내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 그럼에도 깊이 들어가기는 어렵다. 겉도는 느낌이 든다. 더 진행되어보았자 자신은 잘났는데 세상이 자신만큼 알아주지 않는다는 푸념이 되기 쉽다.

 

나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수다를 배우고 싶다. 아내한테 배우고 아이들한테 먼저 배우려고 한다. 배운다는 것보다 익힌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자꾸 하다 보면 늘어나는 게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어색하면 이제는 먼저 내 고민을 이야기 한다.

“탱이야, 너랑 수다를 떨고 싶은데.”

“좋아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이런 분위기가 자체가 어색하니까 수다 자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면 어떨까?”

“글쎄요. 여자들은 여기 앞에 있는 복숭아 하나 가지고도 많은 이야기가 되요. 침묵이 어색하니까 수다가 나오는 거지요.”

“‘침묵이 어색하다.’ 그건 남자들도 그래. 그런데 이걸 깨는 게 어렵지. 침묵을 즐기는 게 아니라 참는다고 봐야지.”

“여자들은 잘 모르는 사람과 침묵하고 있으면 두려움이 생겨요.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면 서로를 알게 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친해지고 정보를 얻기도 하고...”

 

침묵이 두려움이 된다는 건 나로서는 아주 색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여자들과 수다를 나누다 보면 무척 생산적이다. 자유롭게 갈래를 뻗어가다가 정보를 풍부하게 나누는 건 물론 삶의 지혜를 건지기도 하고,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도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통할 때 오는 쾌감! 이 쾌감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의도적인 노력으로 얻은 즐거움이다. 나는 언제쯤 수다를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