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
이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한다면 2010년대는 동시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시인이 동시를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일탈, 또는 개인적인 취향 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인들의 동시 쓰기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주목해야 할 한 흐름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1998년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실천문학사)를 낸 김용택 시인의 뒤를 이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최승호, 안도현, 도종환 등 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들이 잇달아 동시집을 출간하기 시작한다. 이를 전후로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동시집 시리즈를 시작하고 비룡소에서는 시인들이 참여하는 기획 동시집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계기로 현재까지 동시 쓰기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시인들의 면모는 노소 불문, 점점 더 다양해지는 양상이다. 얼추만 꼽아 봐도 신경림, 이기철, 정진규, 김명수, 김용택, 고형렬, 문인수, 최승호, 도종환, 안도현, 송찬호, 맹문재, 이은봉, 함민복, 이정록, 이대흠, 신현림, 박성우, 최명란, 김륭, 김민정, 김근…… 심지어 백무산, 송경동 같은 대표적 참여시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헤아리는 게 의미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2010년대 한국에는 딱 두 부류의 시인이 있는 것이다. 동시를 쓰는 시인과 쓰지 않는 시인.
어떤 연유로 2000년대 들어 동시가 이처럼이나 시인들에게 매력적인 장르가 되었는지는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지만, 실상 우리 현대시 역사의 초창기(1920~30년대)에 시인이 시와 함께 동시를 쓰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당연지사에 가까웠다. 동요 동시를 전문으로 쓴 윤석중, 이원수 외에 김소월이나 정지용, 오장환, 백석, 윤동주, 박목월 등 빼어난 시인들이 시와 동시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갔으니 말이다.(<겨레아동문학선집> 9권, 10권. 보리 1999. 참조)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 이 흐름이 끊어져 시인들은 시만 쓰고, 동시는 동시만을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의 몫으로 동시 창작층이 대거 축소되기에 이른다. 예외적으로 박목월, 오규원(<나무 속의 자동차> 민음사 1995), 소설가 이문구(<개구쟁이 산복이> 창비 1988) 등이 주목할 만한 동시집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개인적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들의 동시 쓰기가 지금과 같이 시단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는 데는 김용택의 <콩, 너는 죽었다>(실천문학사), 안도현의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모두 5권, 비룡소 2005~2010)이 거둔 성공의 파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이런 움직임이 개인적 일회적 차원에 그치지 않도록 동시집을 시리즈로 묶어내고 있는 출판사 문학동네나 비룡소의 역할도 컸다.
그런데 동시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동시란,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시다. 그러니까 동시는 시이기는 한데 시에 비해 독자에 더 가까이 다가간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라고 하는 제한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창작되는 만큼 예상 독자의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조건 쉽다고 해서 좋은 동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소 어렵다고 해서 좋은 동시로서 결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동시가 시인 한에서, 동시 독해의 어려움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히려 너무도 쉬운 동시, 그 작품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독자의 정서나 인식에 조금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작품일 것이다. 이런 작품이 예상보다 많은 것은 동시 독자인 어린이의 수준을 너무 일반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접근해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독서 능력에서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연령에서도 편차가 큰 구체적인 동시 독자 어린이의 문제를 시인들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접근 방식이 동시의 재미없음, 비예술화로 나타나고, 이는 다시 독자로부터의 소외, 창작층의 고립 현상으로 이어져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문제는, 독자가 아니라 시인 것이다. 동시의 소외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많은 배려를 해왔다는 데 있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시를 소홀히 해왔다는 것. 그러니까 2010년대 동시의 목표는 독자와 시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 사이가 전에 없던 긴장으로 팽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즉 기존 동시 관념에 기대기보다는 그것에 맞서 ‘나는 어떤 동시를 쓸 것인가?’ ‘내 동시 독자는 어떤 어린이들인가?’와 같은 좀 더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창작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개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금의 동시 호황은 일시적인 유행 이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의 일반 독자(어린이에서부터 청소년, 어른 포함)로서는 지금의 동시 부흥이 동시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는 분명하다.
동시에 매력을 느끼는 정도는 좋은 동시를 읽은 경험에 비례한다. 달리 말해서 좋은 동시를 많이 읽은 독자일수록 동시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좋은 동시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겨레아동문학선집> 9권 10권. 방정환에서부터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발표된 작품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 묶었다. 우리 동시의 유산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90년대까지 나온 동시집 가운데 필독을 권하고 싶은 동시집으로는 <감자꽃>(권태응, 창비), <개구쟁이 산복이>(이문구, 창비), <탄광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사), <콩, 너는 죽었다>(김용택, 실천문학사), <빼앗긴 이름 한 글자>(김은영, 창비) 등이 있다.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나온 동시집으로는 <샛강 아이>(류선열, 푸른책들), <불량꽃게>(박성우, 문학동네), <맛의 거리>(곽해룡, 문학동네),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김륭, 문학동네), <오리발에 불났다>(유강희, 문학동네), <저녁별>(송찬호, 문학동네), <삼베치마>(권정생, 문학동네),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정완영, 사계절), <바닷물 에고, 짜다>(함민복, 비룡소), <말놀이 동시집>(최승호, 비룡소),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안도현, 실천문학사), <아기까치의 우산>(김미혜, 창비), <놀아요 선생님>(남호섭, 창비), <난 빨강>(박성우, 창비), <콧구멍만 바쁘다>(이정록, 창비), <까불고 싶은 날>(정유경, 창비), <깜장 꽃>(김환영, 창비), <축구부에 들고 싶다>(성명진, 창비)를 권하고 싶다. 전래 동요에서부터 최근 동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를 노래로 만들어온 백창우의 작업들도 지나칠 수 없다. 또한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http://cafe.daum.net/iansi)은 동시 여행길을 좀 더 알차게 안내해줄 것이다. 이렇게 동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시가 참으로 아름다운 문학예술이라는 것, 동시에는 시와는 뭔가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 동시 읽기는 쉬워도 동시 쓰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 그럼에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것. 좋아서 푹 빠져도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는 반면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동시 쓰기다. 꼭 도전해 보시기 바란다. 스스로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한 작품을 쓰게 되면 <동시마중>이나 <어린이와 문학>, <창비어린이> 등에 투고하시면 된다.
동시는 시이지만, 독자와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다. 그런 만큼 시보다 독자층이 넓을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동시가 어린이 독자뿐만 아니라 어른 독자의 외면을 받아왔다면, 그것이 동시여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원인은 이제까지의 동시에 시가 결핍되어 있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동시의 1차 독자인 어린이는 물론이고 문학적 교양을 갖춘 어른 독자에게까지 두루 미적 쾌감을 주는 것이 동시 창작의 1차 목표다. 어른 독자에게 아무런 미적 쾌감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동시가 될 수 없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떤가? 어른 독자에게는 분명 좋은 작품으로 다가오는데 어린이 독자가 어려워한다면? 어린이 독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안
1999년 <실천문학> 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을 냈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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