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메아리 다섯번째 원고입니다.
가을걷이를 마치며, 올 한 해 농사를 되돌아본다. 농사는 먹을 양식 못지않게 삶의 지혜를 준다. 이번에는 호박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호박은 참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식이다. 땅바닥을 기면서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앞에 나무가 있으면 덩굴을 타고 올라가 햇살을 마음껏 받는다. 잎은 또 얼마나 넓은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해를 다 받아낼 듯이 활짝 펼치며 자란다.
사람들은 이 호박을 어릴 때는 애호박으로 즐겨먹고, 가을에는 금빛 나는 청둥호박을 거두어 추운 겨울에 보약으로 먹는다. 호박과 농사꾼의 숨바꼭질은 애호박일 때다. 애호박은 암꽃이 수정을 끝내고 나면 쑥쑥 자란다. 그런데 이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호박잎도 푸르고, 애호박도 푸른데다가 잎이 넓어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박 처지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창 자라는 애호박일 때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짐승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 애호박은 아직도 씨앗이 여물지 않은 아기일 뿐이다. 호박 처지에서는 어떡해서든지 튼튼하게 잘 자라, 제 자손을 퍼뜨려야하지 않겠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으로서 애호박을 찾는 수고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끔은 미안한 마음도 가지면서.
그러다 호박이 다 자라면 빛깔이 달라진다. 푸르던 애호박이 차츰차츰 노랗게 바뀌다가 다 익으면 황금빛으로 빛난다. 껍질도 단단해진다.
이 때는 굳이 청둥호박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푸른 빛깔 속에 도드라지는데다가 호박잎보다도 호박이 더 크기에 눈에 잘 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 내가 있소. 어서 나를 데려가 주오."
여기에도 역시 호박의 생존 기술이 숨어있다. 만일 호박이 늙은 상태로 그 자리에서 썩는다면 그 속에 씨앗들은 이듬해 좁은 환경에서 경쟁을 치열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호박은 누군가가 자신을 옮겨주고 퍼뜨려주길 바라게 된다. 황금빛깔로 빛나면서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은 청둥호박을 먹으면서 그 씨앗을 여기저기 퍼뜨리게 된다. 호박 씨앗을 술안주로도 하지만 그 많은 씨앗을 다 먹지는 못한다. 농사꾼 역시 가장 잘 자란 호박을 골라 그 속에 든 씨앗을 따로 챙겨둔다. 이러저런 과정에서 씨앗은 제 어미가 자란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퍼져간다.
이쯤에서 시적인 그림이 하나 떠오른다. '청둥호박은 이력서를 쓰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자녀교육과 삶에 중요한 영감을 얻는다. 요즘은 지나친 교육열로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어른이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많다. 여기저기 무슨 시험이다 하면 만사 제쳐두고 올인한다. 아직 씨도 안 생긴 초등학생은 물론 한창 씨가 영글어야 할 사춘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부모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으며 자라야할 아이들을 과잉 경쟁에 내몰고, 심지어 자녀를 일찍이 상품화하는 부모도 있다.
그러나 정작 과잉경쟁에 내몰린 아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속을 끓는다. 청둥호박은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서로 차지하려 한다. 사람도 자연의 섭리를 존중한다면 호박한테 배울 필요가 있으리라. 굳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스스로 빛이 나,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올 가을엔 더 그립다.
http://www.jjan.kr/society/others/default.asp?st=2&newsid=2010110219525701&dt=20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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