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두 번째 글입니다.
논에 가니 벼꽃이 피기 시작한다. 사람은 한여름 무더위로 지치기도 하지만 벼는 이를 달게 받아 꽃을 피운다. 벼꽃은 앞으로도 보름가까이 이삭 따라 차례차례 시나브로 피었다가 지리라.
벼꽃이 뭔가. 바로 우리네 쌀이 되고 밥이 되는 꽃이다. 세상에는 꽃이 많기도 하지만 가장 소중한 꽃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벼꽃을 들겠다. 우리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목숨을 살려주는 꽃이 아닌가. 하여, 나는 벼꽃을 '목숨꽃'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벼꽃은 참 볼품이 없다. 대부분의 곡식 꽃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벼꽃은 그 가운데서도 볼품이 없다. 암술은 껍질 속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고, 수술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고, 빛깔도 노란 빛이 살짝 섞인 흰빛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 흔한 꽃잎조차 없다.
오래 피지도 않는다. 껍질 하나가 벌어졌다가 닫히는 데 고작 한 시간 남짓. 그리고 나면 수술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 없이 떨어진다. 향기도 없고 꿀도 없으니 벌도 나비도 날아오지 않는다. 껍질이 벌어지는 순간, 수술이 제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뿌리면서 수정을 끝낸다. 벌어진 껍질이 다시 닫히고 나서, 45일쯤 지나야 쌀 한 톨이 생긴다.
벼꽃은 겉보기는 볼품이 없어도 알면 알수록 성스러운 꽃이다. 사람들 몸짓과 닮은 구석이 많다. 날씨가 좋다면 하루를 기준으로 오전 열한 시에서 오후 한 시 사이에 많이 핀다. 우리네 결혼식도 대부분 그 시간대가 많지 않나. 수정 순간도 사람 몸짓과 닮았다. 수정을 끝낸 수술이 서서히 축 늘어지는 모습 역시 남자의 성을 보는 듯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수정하기 전이나 수정 뒤 벼의 껍질은 때가 되지 않는 한, 제 스스로 결코 벌어지는 법이 없다. 수정 전은 처녀성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며, 수정 뒤는 모성을 온전히 품는다. 말린 벼는 일년쯤 지나도 끄덕 없다. 그 이유는 바로 벼 껍질 때문이다. 벼는 벌레나 곰팡이가 침범하는 걸 단호하게 물리친다. 같은 조건에서 광에다 둔 팥이나 수수는 팔월만 되면 줄줄이 벌레가 나는 상황인데 말이다. 이렇게 끈질긴 생명력 덕택에 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이어오고 또 자식을 이어온 셈이다.
요즘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내 이웃 가운데 사는 게 힘들어 죽으려던 분이 있었다. 어찌 죽을까 생각하다 굶어죽는 게 좋겠다 싶어 굶기로 했단다. 그런데 정작 굶다보니 배가 고파진 것이다. 배가 고프다는 건 삶의 의욕이 살아난다는 뜻과 같지 않나. 하루 굶고 이틀 굶을수록 살고 싶은 마음도 새록새록 돋아났단다.
우리 사회는 요즘 쌀이 남아돌아 처치 곤란이란다. 곧이어 햅쌀이 나올 텐데 정부는 더 이상 들일 창고가 없다고 강 건너 불구경이다. 나라 식량자급률이 30%도 안 되는 데 말이다. 생명은 돌고 돌아야한다. 아무리 단단한 벼 껍질도 오래 묵히면 벌레가 뚫고 들어가고, 벼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죽어간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태 역시 쌀 푸대접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 볼품없는 벼꽃이 우리네 목숨을 살리듯이 보통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우리 사회를 빛나게 한다. 행여나 자기 목숨이 하찮다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한번쯤 벼꽃과 입맞춤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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