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교육에 관한 글을 한편 쓴다. 주제는 ‘자기 삶에 주인 되는 교육’이다.
자연분만 하는 이웃들에게 가끔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기를 낳은 거냐 아니면 아이가 나온 거냐고. ‘낳다’는 부모 처지에서, ‘나온다’는 아기 처지에서 이야기가 된다. 보통은 아기와 그 부모 그리고 산파가 힘을 함께 해서 낳지만 나는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따져보곤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은 입시 교육이 아닌 생명 교육이며, 자기 삶에 주인 되는 교육이다. 자기 삶의 주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다. 이는 어른만 그런 게 아니라 갓난아기도 뱃속 아기도 마찬가지.
뱃속 아기는 때가 되면 제 엄마의 의지에 상관없이 아기 스스로 먼저 움직인다. 자궁을 벗어나 산도로 미끄러지듯 조금씩 돌면서 나온다. 엄마와 열달 동안 호흡이 잘 맞으면 태어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기는 자궁 속에서라면 시공간에서 엄마에게 전적으로 딸린 존재이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당 정도 독립이 된다. 제 힘으로 젖을 빨고, 숨을 쉬고, 똥을 눈다. 좀더 자라면 뒤집고 배밀이를 해서 자신의 공간을 넓혀간다.
그러다가 서고, 걷게 되면 삶의 공간은 한결 넓어진다. 서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지는가. 덩달아 호기심도 크게 늘어난다. 그렇다고 아기는 갈 수 있는 만큼 다 가는 게 아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는 만큼만 간다.
자신이 주인으로 서기 위해 아기들이 하는 몸짓은 먼저 ‘살피기’다. 태현이가 14개월쯤에 우리 집에 왔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네 집이라면 이곳저곳을 아장 걸음으로 돌아다닐 텐데 새로운 환경이다 보니 우선 엄마 품에 안긴다. 어른들 말소리에 담긴 그 어떤 기운을 감지하면서 조금씩 둘레를 살피기 시작한다. 어른들 사이 분위기가 좋다는 걸 느끼면서 엄마 치마폭을 붙잡은 상태에서 조금씩 움직인다. 그러다가도 다른 어른들이 자신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면 다시 엄마 품으로 속 들어간다. 마치 어미 닭 속에 병아리와 비슷하다. 병아리 역시 그렇다. 밖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어미 품속에서 눈만 내밀고 살피다가 익숙해지면 어미 품을 나온다. 태현이는 둘레 환경이 익숙해지면, 자신이 있는 만큼만 움직인다. 점차 엄마 치마를 놓고 형이나 누나들한테 관심을 갖고 가까이 가기 시작한다.
어제 우리 집에 온 가온이도 그렇다. 가온이는 18개월 된 남자 아이.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마당에 떡 하니 서, 둘레를 살핀다. 누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무엇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위험한지를 살핀다. 조금씩 자신이 서자, 움직인다. 아이 눈에는 얼마나 새로운 게 많은가. 여기 나무 한 그루, 고양이 한 마리 다, 새롭다.
중요한 건 그런 환경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느냐 아니냐이다. 가온이 엄마가 그런다.
“집에서는 닭이나 개한테 대장이에요.”
여기서도 그랬다. 처음에는 개가 낯서니 먼저 눈싸움을 한다. 개와 눈을 마주치면 개는 이내 눈길을 돌린다. 맞설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 둘레 공간은 가온이가 주인이 된다. 가온이네 식구들과 마을 산책을 가다가 아이가 문득 멈추어 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멀리서 들리는 이웃집 닭 울음 소리 때문. 그 순간 아이 표정이 진지하고도 미묘했다. 소리가 어디쯤에서 나는지를 가늠하며, 몇 마리인지, 또 자기네 집에 닭과 어찌 다른지를 가늠해보는 그런 표정. 생각이 복잡한 어른들이라면 닭 울음소리나 새소리조차 듣지 못할 때도 많다. 자기 머릿속 생각에 빠지면 둘레 소리가 안 들리게 마련이다. 반면에 자연이 온전히 살아있는 아이들은 온몸을 열고 둘레를 살피고, 익히며,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자신이 섰는지, 저도 소리를 낸다. 배는 물론 온몸으로 내는 소리.
“어~어! 음!”
좀더 자신 있을 때면 몸을 겅중겅중 뛰면서 소리를 지른다.
“야아~. 워~어!”
이럴 때는 ‘엄마 아빠’라는 인간의 언어만이 언어가 아니다. 이런 소리는 아이가 주인 되었을 때 내는 자연의 언어다.
산책 마지막 코스로 현빈이네 집에 들렸다. 현빈이네서 손님 대접한다고 떡을 내어놓았다. 어른들끼리는 서로 할 이야기도 많고, 배도 고프지 않아 떡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가온이는 어른들이 챙겨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젓가락을 집어 떡을 끼워 먹기 시작한다. 서툰 젓가락질이지만 열심이다. 그리고 저만 먹는 게 아니다. 그 사이 나와 친해졌는지 내게도 떡을 권한다. 이럴 때는 그냥 어린 아이가 아니다. 독립되고 당당한 인격이 아닌가.
그렇다. 아이들은 보살핌만 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집에 다시 내려와서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친다. 그 짧은 순간, 고양이와 통했나 보다.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등을 만져준다. 그러자 고양이가 아예 드러눕는다. 아이도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편안하게 어루만져준다. 둘은 잠깐 사이에 친구가 된다. 이럴 때 부모가 억지로 품에 끼고만 있으면 아이의 자연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자연성은 모든 사회성의 기초가 된다. 보통 사회성을 이야기할 때 놓치기 쉬운 게 바로 자연성이다. 인간 사회는 자연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사회는 인간 중심이며, 자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좁은 세계에 불과하다. 자연 만물과 두루 어울릴 수 있는 자연성이 있을 때 사회성도 그 빛을 보게 된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연에 기초할 때 자기 영역에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란다. 점차 자라면서 주인 영역도 조금씩 넓어지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폭이 좁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자면 오감을 살리고 육감을 키워야 한다. 육감은 오감이 통합되어 다가오는 직관에 가까운 느낌이다. 아기들은 육감이 좋다. 둘레 환경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인다.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는 울음이 잦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자신이 주인 되기에는 둘레 환경이 벅차다. ‘하지 마라, 안 돼.’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밥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들으며 자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에서 물려받은 육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감도 그렇다. 육감이 환경에 대한 몸과 마음의 종합적인 느낌이라면 영감은 인간 내면에서 솟아나는 창조적인 느낌이다. 이는 보통 예술로 표현된다. 나는 누구나 영감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가 창조가 되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아이가 태어난 것 자체부터 영적인 뜻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갈수록 우리 안에 영감은 풍부하게 솟아난다. 남과 경쟁하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자기 삶에 주인으로서 신비로운 삶을 펼쳐가야 하지 않겠나. 아이가 자랄 때부터 주인 되지 못하면 몸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른 구실을 하기가 어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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