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골 내려와서 부안 정경식씨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정씨는 정농회 부회장으로서 맨 손으로 삶을 일구어낸 유기농 대 선배다. 내가 방문한 해는 낡은 집에 살다가 집을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 때 이 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울타리 콩. 처마 아래 울타리 콩을 심고 덩굴이 잘 올라가게 대나무로 버팀대를 해 주었다. 마당에서 지붕 위까지. 울타리 콩이 잘 영근 모습도 좋았지만 이렇게 집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웠다.
보통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죽어라 일만하는 소’를 떠올린다. 60~70년대 농촌 모습이 그러했기에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로 굳어진 셈이다. 나 역시 그랬기에 이 집 모습은 신선했다. 낭만, 여유, 예술, 감흥...농사도 지으면서 아름다움도 같이 누리는 모습이라면 한결 ‘진화된 농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하리라 마음먹고 씨앗용으로 울타리콩 몇 알을 얻어왔다. 알록달록 울타리 콩은 그 자체로도 참 예뻤다.
겨우내 집수리를 끝내고 농사로 넘어가는 길목. 농사로 방향 전환을 해야하는 데 집수리 여진이 남아 쉽지가 않다. 집과 농사를 연결짓는 일로 마당에서 처마로 이어지는 버팀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우선 시범적으로 마당 일 미터 정도만 먼저 해 보기로 했다.
장소는 집에서 서쪽. 아궁이 군불지피는 달개지붕 아래다. 이곳에 심고 싶은 곡식은 무엇이 좋을까. 덩굴을 타고 올라가며, 꽃이나 열매가 보기 좋은 곡식. 쉽게 떠오르는 게 울타리 콩과 갓끈동부. 이 둘은 꽃도 좋지만 꼬투리도 보기 좋다.
꽃과 향으로 좋은 것은 더덕. 이 꽃은 오각형 모양의 신비로운 꽃이다. 잎을 만지면 그 자체로 향기를 뿜어내는 이래저래 신비로운 곡식이다. 그리고 더덕은 다년생이다. 한번 심어 두면 김만 잘 매주면 된다.
그리고도 욕심이 더 난다. 수세미나 오이도 심고 싶다. 박도 심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 곡식은 세력이 왕성해서 그 둘레 곡식이 자라기 어려울 정도다. 참나, 일 미터 남짓 작은 땅에 심고 심은 것도 많다.
덩굴 곡식을 심을 곳을 먼저 30센티 깊이로 판다. 생땅의 흙을 파 낸 다음 둘레에다가 사진에서 보듯이 붉은 벽돌로 쌓는다. 이 벽돌은 구멍이 뚫린 게 나중에 대나무를 꼽기에 좋다. 벽돌이 마르자 곡식 심을 자리에 부엽토와 재 그리고 퇴비를 넣었다. 나중에 지렁이도 넣고 다양한 음식물 찌꺼기도 넣어가며 여러 가지 실험도 해 보고 싶다.
이제 대나무만 설치하면 된다. 마당에서 서까래 높이까지에 맞추어 대나무를 준비. 이 때 대나무는 곁가지를 살린다. 크게 벌어져 오고가는 데 걸림이 되는 가지만 정리를 해준다. 이렇게 하면 덩굴이 자유롭게 뻗어갈 수 있다. 서까래와 대나무가 만나는 곳은 나사못으로 고정을 한다. 맨 아래는 벽돌 구멍에 대나무를 끼우고 작은 돌로 대나무가 움직이지 않게 틈새를 메운다. 그 다음 철사로 대나무끼리 듬성듬성 엮는다.
자, 나 나름대로 완성했다. 이를 나는 거창하게도 설치미술이라 부르고 싶다. 살아있는 미술, 곡식이 자람에 따라 시시각각 미술품도 바뀌지 않겠나. 좀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곡식과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예술. 싹이 나고, 덩굴이 뻗어가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고, 한해살이를 마감하는 그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줄길 수 있으리라.
정경식씨네 집에서 영감을 받고, 14년이 지난 지금에야 내 마음 속 그림을 현실로 드러냈다. 앞으로는 내 안에 잠자던 예술성을 잘 살려가는 농사꾼이 되고 싶다. (2009.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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