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몸 공부, 마음 이야기

앞치마의 힘

모두 빛 2009. 2. 23. 05:07

점심이 늦어져 부랴부랴 밥상을 차린다고 앞치마를 하지 않았다. 김치찌개를 하려고 김치를 두 손으로 꼭 짜는데 찍!

 

김칫국물이 물감을 옷에 뿌린 것 마냥 티에 점점이 묻는 게 아닌가. 김칫국물이 옷에 스며들기 전에 얼른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나마 좀 나아졌다.

 

그 다음 국간장을 꺼내 따르다가 이번에는 바지에 간장을 흘리고 말았다. 오늘은 하는 일마다 이렇게 칠칠맞다. 앞치마 안 한 벌을 톡톡히 받는구나. 나중에 바지와 티를 빨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생겼다.

 

밥을 먹으면서 반성이 된다. 앞치마를 할 때는 이런 적이 거의 없다. 어쩌다 국물 한두 방울이야 튀기도 하겠지만 온몸에 양념을 뒤집어쓰듯이 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까 앞치마를 한다는 거는 요리와 설거지를 한다는 마음의 자세다. 즉 지금 할 일은 바로 눈앞에 일이라는 걸 몸과 마음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일을 더 빨리 한답시고 앞치마를 하지 않은 순간을 돌아보면 자기분리 상태다. 몸은 김치를 만지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먹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러니 김치를 짜면서도 김칫국물이 어찌 나올지를 예상하지 않는다.

 

반면에 앞치마를 하면 내가 지금 김치를 만지고 있다는 걸 몸과 마음이 다 잘 알고 있다. 한결 더 집중해서 김치를 다루게 된다. 집중도는 안정감을 주고, 안정감은 다시 집중도를 높인다.

물론 주방 경력이 짱짱한 사람이라면 앞치마를 하지 않고도 안정감 있게 음식을 잘 하고, 설거지도 잘 할 것 같다. 하지만 주방일이 서투른 내게 앞치마는 필수품이어야 한다.

 

앞치마, 참 사랑스런 물건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주방 일을 하게 만드는 옷. 남자에게 치마는 어색하지만 앞치마는 그렇지 않다. 참 사랑스럽다. 해야 하는 앞치마가 아니라 하고 싶은 앞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