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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치는 민성이. 민성이는 아빠가 치는 모습을 보고 기타를 익혔다. 작곡에도 관심을 가져 조금씩 해보고 있고, 점차 음악 이론에도 관심을 가진단다.
“남자는 아기 낳는 게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기에 간접 경험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만 아기 낳기 전부터 공부하고 또 임신기간이 10개월이나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기 낳기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관찰하고 부부가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는 부부가 이처럼 한몸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더 나아가서 온 가족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때 원정씨가 토를 단다.
“당신 이야기, 너무 거창하다(웃음). ‘하나’ 어쩌고 하는 말이.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말로 하려니까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고(웃음).”
“원정씨가 남자들을 잘 모르는 거라 봐요. 나는 영석씨한테 별로 부러운 게 없는데 이 부분은 두 번 세 번 들어도 부러워요(웃음). 나는 그런 경험이 없기에. 이 집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집에서 아기 낳고 또 남편이 아기를 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설레기도 하거든요. 탯줄을 남자가 끊었다는 건 한마디로 ‘뿅’ 가는 거야(웃음). 집집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씩 다르잖아요. 원정씨는 지구 중력을 빌려, 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았다 했는데 이런 경험이 잘 드러나고 또 모아져서 그 지평이 넓어지면 좋겠어요.”
“출산이라는 게 사실 성스러운 일이라는 거를 사람들한테 이야기해보고 싶데요. 이번 전시회에서 보니까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먼저 관심을 보여요. 오는 엄마마다 아이들에게 신나게 그림 이야기를 하데요.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첫 단추가 애 낳는 거잖아요. 여기서 잘하면 그 다음 단계의 교육도 자연스럽게 되리라고 봐요.”
전시회가 끝나고 다시 날을 잡아, 경남 산청에 사는 민성이네를 찾았다. 민성이네 집은 영석씨가 3년 걸려 손수 지었다. 따끈따끈한 구들방 아랫목에 둘러앉아 전시회 뒷이야기, 농사 이야기, 겨울 준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모아졌다.
민성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열흘 정도 다닌 게 전부다. 민성이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물론 부모 영향이 크다. 공영석, 서원정씨는 미술을 전공한 부부다. 이들이 부산을 떠나온 지는 10여 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에요. 그림 자체를 교육의 방법으로 여기는 거지요. 그림을 통해서 아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자연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지요.”
이들 부부는 민성이 그림에서 자신들이 갖지 못한 생명력을 느꼈다 한다. 그렇다면 생명력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 달 전기료 1200원
“자기가 가진 고유한 자연 에너지라고 봐요. ‘잘 그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없는 상태로 그리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묻어나는 거 아닐까 싶네요. ‘생명력’이라고 하면 말로 하기 이전에 느끼는 게 있잖아요. 우리는 생명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데도 잘 안 되는데 아이는 그걸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가진 고유한 생명력이 드러날 때 그 힘은 둘레에 다른 사람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생명력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문다. 영석씨는 군불도 지펴야 하고, 원정씨는 밥상을 차리려고 일어선다. 잠자리를 따뜻이 하고, 밥을 먹는 것이야말로 생명력의 가장 기본일 테다.
민성이네는 자급자족 농사를 지으며, 하루 두 끼를 먹는다. 아침 겸 점심은 10시쯤. 저녁은 오후 다섯 시쯤인데 저녁으로 민성이네가 손수 농사지은 쌀밥에다가 시금치무침, 배추쌈, 콩장, 감자전이 나왔다. 안주인의 정갈한 솜씨로 작은 상에 안온하게 차려진 밥상, 잘 먹었다.
작은아이 태현이는 내게 관심이 많다. 나 또한 이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태현이는 자기가 가지고 놀던 놀잇감을 하나 둘 내게 가져다준다. 장난감 자동차, 필통, 연필….
아이가 내게 건네준 것 가운데 전기요금 고지서도 있다. 언뜻 보니 눈에 확 띄는 게 있다. 지난달 전기요금이 2200원이다. 그 전달은 1200원.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없는데도 전기요금이 1만원가량이다. 이쯤이면 민성이네 생활 씀씀이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삶은 여유롭고 생동감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이들 교육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민성이는 그림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적극적이다. 보통 아이들은 글을 숙제로 마지못해 쓰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민성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쓰고 싶은 이유라고 해야겠다. 민성이가 곁에서 듣고 있다가 나선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글을 썼는데 나중에는 옆 마을에 사는 누나도 같이 하데요. 어른들이 그 누나 보고 잘 썼다 하니까, (저는) 화가 날 정도예요(웃음).”
이곳에선 이웃 몇 가정이 모여 한 달에 두어 번 문예모임을 한다. 재미있는 건 어른 아이 모두 함께한다는 점이다. 누구든 글을 쓰고, 또 이를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한다고 한다.
“민성이가 샘이 많아요. 그 누나는 민성이보다 나이도 많고 글도 잘 쓰니까 마을 문예 모임에서 관심이 집중되잖아요. 저절로 아이한테 자극이 되나봐요. 처음에는 어른들한테 자극을 받아 아이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이들 글을 보면서 어른들이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금방 실력이 느는 것 같아요.”
“아빠 없으면 글이 안 되겠네”
다음 글은 민성이가 문예 모임에서 발표한 ‘아빠 이야기’라는 글이다.
〈 아빠 이야기 〉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늦게 양치를 하는 아이였다. 그날 밤, 태현이를 재우기 위해 엄마 아빠가 먼저 양치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아빠가 들어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불 다 끄고 들어오인나(들어오너라).” 나는 양치를 다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갔다. 그때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뛰면 구들 꺼진다! 한번만 더 그래봐라!” 갑작스럽게 아빠가 화를 내서 평상시 습관대로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울었다. 다시 돌아누워 아빠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말했다. “아빠, 고마워. 글 쓸 소재를 제공해줘서.” 이렇게 해서 아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며칠 전 아침에 갓과 배추를 막장에 찍어 먹었다. 내가 말했다. “이거 갓이야, 배추야?” 아빠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니 산골에 살면서 어떻게 갓과 배추를 구별 못하노! 니 지인짜 문제네. 배추는 두껍고 갓은 얇다 아이가.”
근데 며칠 전 엄마가 갓을 씻으려고 차곡차곡 포개어 물에 담궈놨는데 저녁밥을 하려고 하니 갓이 안 보여 아빠에게 “혹시 당신 수돗가에 있는 갓 못 봤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빠가 화를 벌컥 냈다.
“그기(그게) 갓이었나? 나는 배추껍데긴 줄 알고 버렸다. 담가놨으면 말을 해야지, 와 말을 안 했노? 당신 잘못이다.”
오늘 아침 나는 아빠에게 이 글을 보여 주었다. 아빠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빠 없으면 글이 안 되겠네.” |
짧은 글 한 편이 많은 걸 보여준다. 내가 평소에 알던 영석씨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사실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그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시콜콜 알기는 어렵다. 게다가 개인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거라면 숨기고 싶을 게다. 그런데도 영석씨는 아이가 쓴 글을 모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준 것이다. 나 자신도 글을 자주 쓰는 편이지만 아이가 이 정도 글을 쓴다는 건 놀랍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데 표현과 기교를 떠나 솔직하면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적절하게 대화를 끌어와 현장감도 있다. 아이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성장의 출발
“사실 처음에는 글쓰기 자체가 어려웠어요. 민성이는 글쓰기를 자주 안 했으니 말하기와 글쓰기에 차이가 커요. 사고의 속도와 글 쓰는 속도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는 사고가 잘 이어지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일단 민성이가 이야기를 먼저 하고 내가 이를 받아 적는 식으로 했지요.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니까 그게 오히려 좋은 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문예모임을 통해 글이 활자화되니까 아이들이 많이 달라지데요. 이제는 서로 먼저 발표하려 해요(웃음).”
원정씨도 이야기를 보탠다.
“전에는 이런 표현을 하면 아빠가 화를 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민성이에게 있었어요. 지금은 당당해져서 그런 게 없어요. 글쓰기가 그런 효과를 낼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린아이가 지적하니까 어른이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내가 남편 잘못을 지적하면 ‘내만 그러나? 당신은 안 그러나?’(웃음) 결국 묵은 이야기까지 나와서 부부 싸움이 되기 쉬운데(웃음). 이렇게 아이가 명료하게 지적하니까 반성을 안할 수 없지요.”
영석씨 또한 원정씨 이야기에 공감하며 한술 더 뜬다.
“아이가 내 잘못을 지적했지만 사실 뿌듯하지요(웃음). 이 이야기는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웃음). 그런 걸 계기로 아이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점이 있구나. 아이는 글을 써서 좋고 나는 나쁜 점을 고쳐서 좋고. 그 과정에서 아이도 나도 성장하니까. 원정씨가 내게 지적을 해서 고쳤다면 억울한 생각도 들고(웃음). 나중에 복수를 벼르잖아요, 괜히 반찬 투정을 한다든가(웃음).”
보통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경쟁, 시험, 성적, 학벌 이런 걸로 재단하기 쉽다. 그러다보면 성장이라는 본래 뜻을 놓치곤 한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더 표정을 잃는다든가 부모와 소통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거대 흐름에서 한발 물러나, 교육에 있어 아이의 성장에 무게를 둔다면 큰 뜻이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면서도 충만함과 기쁨으로 나갈 수도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어른도 성장할 수 있다면 자식 키우는 맛을 단단히 누리는 셈이다. 무엇이 성장을 가로막을까. 또 성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자급자족하는 예술
“성장의 출발은 자기 단점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나 싶네요. 얘가 그런 글을 쓰니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발표하니까. 효과가 당장 나타나는 거지요. 보통 조언을 한다면, 자기와 처지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하잖아요? 아이들이 조언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민성이 역시 내게 조언한다고 한 거는 아니라고 봐요.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는 거지요.
사실 사람마다 고쳐야 할 점이 많이 있잖아요. 저는 화를 잘 내요. 큰일에는 화를 잘 안 내는데 오히려 사소한 일에 화를 잘 내요. 잔소리도 많이 하는데, 이 두 가지가 나중에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가족 사이 에너지 소비이지요. 에너지가 자꾸 그런 쪽으로 새니까. 문제지요. 그보다는 창조 쪽으로 나아가야하는데….
내 잘못을 아이가 지적해주니까, 전체 가족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거지요. 가족 전체가 성장하지 않으면 개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봐요. 반대로 내가 성장하지 않으면 가족의 성장은 있을 수 없고요.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거지요.”
이는 사회 전체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사회가 성장해야 개인도 성장할 수 있고, 개인이 성장할 때 사회도 조금씩이나마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정쟁은 사회적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민성이는 혼자서 여러 가지를 한다. 그림도 그리고 뜨개질도 한다. 그러다가 자기 이야기가 나오면 슬며시 끼어들기도 한다. 또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은 태현이랑 놀기도 한다. 태현이도 저대로 놀다가 엄마에게 달려가 젖을 빤다.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이 남남이 아닌 식구처럼 한방에 둘러앉아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젖을 먹고 난 태현이는 또 저대로 논다. 가끔 민성이가 그림 그리는 데 참견도 하고,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고요하면서 그 어떤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다.
밤이 늦으니 아이들 눈꺼풀이 조금씩 처진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어른들도 이야기를 접고 함께 잠을 잔다. 이튿날은 만남을 정리하는 뜻에서 음악 교육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 가족의 표현을 빌리면 예술의 자급자족이란다.
“자기 먹을 거를 자기가 농사를 짓듯이 예술 작품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 작품을 소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하는 사람, 달리 말하면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특정 분야의 예술가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모든 분야를 두루 표현할 줄 아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는 게 우리 바람이지요. 이는 예술 이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삶에서 느끼는 감동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 하나만 얘기해주세요. 되도록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다면 더 좋은데.”
신성함… 충만함…
“해가 떠오를 때 우리 뒷산 소나무에 먼저 햇살이 닿아요. 천천히 햇살이 아래로 내려오잖아요. 그걸 보면서 생각해요. ‘조금 후에는 내 몸에 햇살이 받겠지.’ 내 몸에 햇살이 조명처럼 천천히 내려오면서 따뜻한 게 몸으로 느껴진단 말이에요. 내 몸이 그렇듯 저 나무나 새들도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을까. 해가 뜰 때 햇볕을 비춤으로써 사물 하나하나를 생각하게 만들더라고요. 해라는 존재가 사물 하나하나를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거지요. 그때 우주의 신성함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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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 ●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 1996년 서울을 떠나 1998년부터 전북 무주에서 자급자족 농사 ● 정농회 회원 ● 저서 : ‘아이들은 자연이다’ | |
‘우주의 신성함’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또 다른 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민성이네 집에 이틀을 머물며 나눈 이야기만 해도 매우 많았다. 교육, 성장, 예술, 자급자족, 전인. 사실 그마다 바다가 펼쳐지듯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충만함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몸을 비추는 햇살조차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요즘 세상은 아이 키우기가 점점 어렵다 한다. 그러다보니 저출산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출산이 설렘이 되고 축복이 될 수 있으며, 아이 키우는 과정 자체가 그 부모 성장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런 힘을 서로 주고받는 날은 정녕 꿈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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