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김광화의 사람 공부, 이웃 이야기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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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 농부 flowingsky@daum.net |
경북 봉화로 떠난 김광화씨. 이번엔 마녀를 만나고 왔다. 지혜롭고 자유로운, 그러나 한때는 우울했던 파랑마녀는 무주에서 찾아온 농부에게 ‘내면을 성장시키는 비법’에 대해 한 수 가르쳐줬다. 옛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 한 어머니의 투쟁기 혹은 치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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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을 나면서 나는 정신세계의 변화를 자주 겪었다. 겨울엔 시간이 많이 남아 책을 본다거나 사색을 하면서 나를 치유하거나 정신을 살찌웠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조금 달랐다. ‘그놈’의 인터넷 덕분에. 우리집에 인터넷 전용회선이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그전에는 전화 모뎀으로 간신히 메일이나 주고받았는데, 인터넷이 되니 세상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는 우리도 공간을 뛰어넘어 쉽게 여기저기 ‘인터넷 마을’을 다닐 수 있다. 그렇게 마을을 가다가 정이 든 이웃 가운데 한 집이 ‘잣나무 옆집’이다.
지혜롭고 자유롭고
잣나무 옆집은 블로그(blog.daum.net/momo64) 이름이다. 이곳에는 장창호(張昌鎬·49), 차정원(車貞媛·44) 부부와 명지(16), 희지(9)가 산다. 명지네 식구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긴 것은 2000년. 충북 단양으로 내려왔다가 2003년에 지금 사는 경북 봉화로 다시 옮겼다. 누구나 그렇듯 삶의 터전을 옮기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시행착오, 시련, 아픔을 겪는다. 명지네 식구도 갖가지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이 집 블로그를 1년 가까이 지켜보니 이 집 식구 중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이가 정원씨 같다. 지난 겨울부터 정원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글 속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한발 더 앞으로 내딛고자 하는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가 주로 쓴 키워드는 ‘치유와 내면의 성장’이었다. 치유(healing). 참 어려운 주제다. 그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 사람마다 치유과정은 조금씩 다를 듯하다. 그런 설렘으로 명지네 식구를 만나고자 봉화로 갔다. 정원씨 닉네임은 ‘파랑마녀’다. 닉네임엔 자신의 꿈이 담겨 있다. ‘마녀’란 마법을 부리는 여성. 이름 그대로라면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겠지. 그동안 파랑마녀와 인터넷으로 자주 소통했기에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이는 어떠한 이유로 마녀를 꿈꾸는 걸까. “예전에 ‘녹색평론’이라는 잡지에서 마녀사냥을 다룬 글을 본 적이 있어요. 흔히 마녀라면 무섭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음울하고 부정적인 존재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고대 유럽에는 강력한 모성을 가진 여성들,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대요. 그런데 이들이 초기 기독교 세력에게 적대시되면서 제물이 됐대요. 저도 지혜롭고 자유로운 마녀가 되고 싶거든요. 그리고 파랑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블루’에서 따온 거예요. 영화에서 상징하는 자유의 색이면서 외로움과 우울함에 시달리는 제 내면을 표현하는 색깔이기도 하고요.”
관념적인 얘기만 할 거야!
치유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자고 하니 그이가 조금 망설이며 남편과 함께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이 남편은 마을 작목반(농산물 생산과 유통을 위해 꾸려진 협동체) 공동퇴비 작업으로 무척 바쁘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 늦은 밤에 돌아온다. 이 집에서 사흘을 머물렀는데 날마다 늦었다. 낮에 일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하며 어울리다보니 늦는 것이다. 셋이서 함께하면 더 좋았겠지만 나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
그이가 남편과 함께 이야기하자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혼자 이야기를 해서 자칫 부부 사이에 오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인터뷰를 계기로 부부 사이에 대화를 더 깊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면 그이는 지금 남편과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집 부부와 함께하기가 쉽지 않으니 우선 한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부부가 시간이 되는 만큼 함께하기로 했다. 그이는 치유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제 내면은 치유할 게 참 많아요. 산골에서 친구도 없이 살자니 누가 치유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치료 상담을 받았는데 몇 달을 했대요. 나야 그럴 형편도 못 되고, 의사와 상담을 한다고 해서 치료효과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요. 이곳 봉화로 옮기고 2005년 한 해 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원래 네 가정이 ‘계획 공동체’를 하려고 봉화에 땅을 사고 이사를 했는데, 우리 가족만 오고 다른 가족은 오지 않았어요. 공동체 생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단지 상황과 조건이 조금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공동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제가 볼 때는 분명한 실패인데 말이죠. 봉화에 온 애초의 목적이 사라지자, 저는 계속 여기서 살 이유를 찾기 어려웠어요. 농사를 짓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남편이 공동체를 원하니 따라왔거든요. 더구나 당시 5학년이던 큰애가 이곳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평소 학교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남편은 아이가 학교 그만두는 걸 찬성했어요. 저는 불안해서 아이를 설득했지만 아이가 꼼짝도 안 했어요. 정말 고민스러웠어요. 남편은 항상 바쁘고 아이 교육이 모두 내 몫이 되니 더 그랬지요.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냥 놔두래요. ‘생명은 저절로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식의 관념적인 이야기나 하고. 남편은 ‘걱정할 게 하나 없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고 해요. 기가 막혔어요. 저 나름대로 이런저런 학습을 시도하다가, 야단을 치다가, 속상해서 울다가…. 얘들 교육도 그렇지만, 농사로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고,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도 부딪치고 자주 싸웠어요. 어느 날은 밭에서 일하다 말고 하루 종일 싸우기도 하고, 차 타고 가다가도 또 싸우고, 다툼은 시시때때로 터지는 거지요. 그러다가 탁!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봉화로 이사 와서도 남편은 단양에서 하던 영농조합일 때문에 1년 동안 일주일의 반은 집을 떠나 있었어요. 산속의 창고 집에서 남편 없이 아이들하고 지내야 했는데 무섭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여기를 떠나려고 했죠. 교사 경험이 있으니까 대안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은 아주 관계가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남편은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데에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요. 내가 여기를 나가면 자기는 사라질 거래요. 자기 혼자서는 여기서 살 이유가 없대요. 다시 가만히 생각하니, 남편 없이 7년 동안 혼자 살아온 것도 부족해서 내가 또 혼자 살려고 나가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구속, 그리고 연좌제
그이 이야기는 언뜻 남편에 대한 원망과 푸념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절망과 상처에는 그 사회와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이가 남편 없이 혼자 살아야 했던 데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
결혼하고 2년이 흘러(1992년) 큰애를 낳고 나흘째 되는 날,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2년형을 선고받고 1999년 2월 가석방될 때까지 6년하고도 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그이는 혼자 아이를 기르며 살아야 했다. 그이는 김영삼 정권의 운동권 복학 조치 때(1993년) 서울교대에 복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를 업고 남편을 면회 가고, 사건 관련자들과 석방운동도 하고, 민주화가족운동협의회 회원으로 집회와 시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렇게 2년 만에 교대를 졸업하고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해서 발령을 기다렸는데 또 다른 족쇄가 그이의 발목을 잡았다. 시대착오적인 연좌제였다. 남편이 지은 죄 때문에 교사 발령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이는 다시 연좌제에 맞서 법정 싸움까지 해야 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역사의 질곡이 아닌가. 그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내게 30대란 강렬한 고통과 어둠 그리고 핍박받는 자의 절규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처들이 제대로 아물지 않는 한 그이 하소연은 어쩌면 좀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이는 1998년 9월 연좌제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내자, 바로 성남 분당의 학교로 교사 발령을 받는다. 그러고는 다음해 2월 남편이 가석방됐고, 아빠 없이도 쑥쑥 커버린 큰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그이는 식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석방된 남편은 시골로 가서 자기가 손수 집도 짓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기를 원했다. 남편은 징역살이 하는 동안 교도소 안이지만 작은 텃밭을 얻어 운동시간 틈틈이 농사짓는 법을 익혔다. 오랜 징역으로 고생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남편은 석방되고 바로 다음해 충북 단양에 땅을 사서 이사했다. 시골로 온 남편은 옥중 생활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억척스럽게 일했다. 집도 짓고, 영농조합도 만들고, 농사도 후배 한 사람과 함께 5000평이나 지었다. 그 와중에 이웃이 남편에게 집짓기를 도와달라고 하자 거절을 못하고 맡아서 했다. 게다가 그이가 둘째를 낳고도 교사생활을 계속 하니 남편이 어린 둘째를 돌보아야 했다. 남편은 철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자꾸 벌여 나가는 남편이 점점 힘들게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교사 생활도 쉽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반 아이들은 적었지만 담임업무 외에 여러 잡무로 몸이 약한 그이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그러다가 이 집 식구들은 또 한 번 터를 옮긴다. 남편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아보자고 ‘계획 공동체’를 제안한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 다시 남편 뜻을 따랐다. 농사로 자급하자는 남편 뜻에 따라 이번에는 교사마저 그만두고 봉화로 터전을 옮겼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면 웬만한 어려움은 삶의 자극제가 된다. 반면에 자신이 흔쾌히 선택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일이라도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이 남편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확신으로 땅에 뿌리내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아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철학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절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명분을 앞세워 가족을 끌어가려 했던 내 모습이 이들 가족과 겹쳐진다. 시골에 내려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내 고민을 들어주기보다 내 식으로 가정을 끌고 가려고 했다. 이렇게 마녀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다보니 이런 갈등을 빚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그러니까 남편들은 사회에서 꽤나 근사하고 고상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 아내들이 겪는 아픔이나 희생은 묻혀 있기 쉽다는 점이다. 밝은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까. 남편이 사회활동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가정일수록 아내가 겪는 아픔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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