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날 잠깐 통장에 머물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돈.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듣는 월급쟁이라면 그래도 성공한 삶이다. 현금으로 10억원쯤은 갖고 있어야 돈의 구속에서 해방된다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많든 적든 내 호주머니에 들어왔다 나가는 돈, 어디에 써야 할까.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한 산골생활, 그곳에서 깨닫는 돈과 몸의 상생 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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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에는 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돈 없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돈이 많든 적든 돈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걸 자주 본다. 사람이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자유로울까. 나는 서울 살 때 돈이 참 무서웠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돈을 제대로 벌지도 못했지만 번 돈을 쓰는 데도 자유롭지 못했다. 성격이 소심해서 사업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성실히 할 만큼 몸도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걸 누구보다 싫어해 직장을 자주 옮겼다. 반면에 아내는 돈벌이와 씀씀이에 대해서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절약하고 사는 삶에 익숙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내는 육아기간을 빼고는 늘 나보다 돈도 잘 벌었다. 집안 경제는 서서히 아내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나는 돈에 대해 소외감과 스트레스가 많았다. 점점 돈에 주눅이 들었고 자신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아내가 가끔 식구끼리 외식이라도 하자고 하면 나는 주머니 생각을 먼저 했다. 아내 눈치를 보며 거절도 못하고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아내는 먹고 싶은 음식을 줄줄이 꿰면서 근사한 식당을 찾아 발품을 판다. 내 얼굴은 나도 모르게 굳어만 간다. 아내가 원하는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차림표부터 슬쩍 본다. 값이 얼마나 하는지. 값이 싼 음식에 눈길이 머문다. 식당 주인이 물컵을 들고 주문하러 오기 전에 얼른 결정해둔다. 값이 싸서 먹는 게 아니라 그걸 좋아한다는 확신을 식구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친구들과 어울려도 술값 한번 호기 있게 내 본 기억이 없다. 먹는 게 그러하니 다른 일은 더 심했다. 친지 결혼식이나 회갑 잔치도 돈에 짓눌려 축하보다 돈 걱정을 먼저 했다. ‘부조금을 얼마 하지?’ 몸이 아파도 견딜 만하면 병원에 갈 생각을 못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날은 월급 탄 바로 다음날이었다.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갖다주면 “수고했다”는 인사 한마디뿐이다. 그리고 가계부를 열심히 적고는 그 다음날이면 “쓸 돈이 없다” 했다. 아내가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로 보였다. 어이없어 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아내는 한 달 동안 써야 할 공과금과 생활비, 그리고 부어야 할 적금 등 항목을 조목조목 늘어놓는다. 물론 아내는 ‘합리적’인 경제행위자로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 만족을 누리는 소비를 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소비나 저축에 익숙하지 않았다. 돈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도시 환경. 한두 해도 아니고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다 보니 돈에 대한 억압과 두려움이 누구보다 많았다. 그러다가 시골로 왔다. 어차피 큰돈을 만질 팔자가 못될 바에는 몸으로 때우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골도 돈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도시보다 씀씀이가 한결 적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은 돈이나마 버는 것이 농촌 경제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돈의 억압에서 풀어준 뒷간
그래도 첫 해 농사를 결산하면서 생각지 못했던 소득이 있었다. 곡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곡식. 그냥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농산물이 ‘빽’이 될 줄이야! 그 뒤에는 내 몸이 있지 않나. 돈으로 쪼그라들었던 내 자존심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만 건강하다면 먹고 사는 건 가능하겠구나!’ 소비는 하기 나름 아닌가. 돈 씀씀이에 대해서는 늘 아내가 중심이다가 처음으로 내가 주체가 되었다. 꼭 필요하다 싶은 최소한의 씀씀이를 ‘내 손’으로 꼽아보니 공과금과 의료보험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 농사로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나머지는 씀씀이를 줄이면서 손수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었다. 돈 대신 몸으로 때우는 첫 실험으로 뒷간을 손수 짓기로 했다. 집터를 닦고 나서 살림집을 짓기 전에 뒷간부터 지었다. 나무는 집터 닦을 때 나온 낙엽송으로 하고, 흙은 뒷간 둘레에 널려 있었다. 지붕 재료는 이 지역에서 잘 자라는 갈대와 억새로, 문은 오고가는 길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 놓았다. 그런데 돈 들이지 않고 짓자니 시간이 문제가 됐다. 자연에는 모두 때가 있다. 갈대나 억새를 베자면 가을에 줄기가 마른 다음이어야 했다. 또 용마름(지붕마루에 덮는 ‘ㅅ’자형으로 엮은 이엉)은 볏짚으로 해야 한다. 볏짚을 미리 챙겨두지 않았기에 가을에 갚기로 하고 아랫마을 아저씨한테 빌렸다. 그리고 이엉 엮는 법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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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랑∼ 사랑∼ 처랑∼
여러 해 동안 홀태로 타작하면서 많은 걸 느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시대를 거슬러 타작을 돌아보면 콤바인 전에는 경운기였다. 내 어린 시절은 발로 밟는 탈곡기(호롱기)였다. 홀태는 이곳 산골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 아랫마을 할아버지네 창고에 녹이 잔뜩 슨 홀태를 처음 본 순간, 잃어버린 보석을 찾은 것마냥 완전히 빨려들고 말았다. 수백년 역사가 바로 눈앞에 좍 펼쳐지는 것이다. 동력화한 기계는 회전운동으로 나락을 훑는다. 홀태는 전후운동이다. 그렇다면 홀태 이전에는 어찌 나락을 거두었을까. 옛날 자료를 더듬어보니, 젓가락같이 생긴 나뭇가지 두 개 사이에다가 이삭을 넣고 당겼다고 한다. 이름도 가락홀태다. 그러다가 나무로 된 손홀태, 그 다음이 쇠로 된 홀태였다. 이 홀태는 이전의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속도도 빠르다. 이삭을 한꺼번에 열 개쯤은 가볍게 훑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쇠로 된 홀태가 나오면서 부의 축적이 광범위하게 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그동안 엄청난 물질문명을 이뤘음에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 그래서일까. 몸으로 느끼는 시간 여행은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다. 홀태로 이삭을 당기다 보면 소리가 난다. 벼이삭은 활이 되고 홀태 빗살은 현이 되어 공명이 생긴다. 그 소리는 사람 처지에 따라 들을 때마다 다르다. 차랑∼ 사랑∼ 처랑∼. 홀태 아래 나락이 그득히 쌓이면 기분이 좋아 ‘차랑’으로 들린다. 이 쌀을 누구와 나누어 먹을까 그럴 때는 ‘사랑’, 태풍에 쓰러지거나 병들어 쭉정이가 많은 나락을 당길 때는 ‘처랑’으로 들린다. 때로는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일에 쫓기면 힘겨움에 숨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홀태로 거두었다고 다 된 게 아니었다. 쌀이 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절구질은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이것도 계기가 생겼다. 어느 해 겨울, 옆마을에 사는 이웃이 절구질로 좁쌀을 쓿고 있었다. 코미디를 보는 듯 웃음이 나왔다. 이웃이 정색을 하고 “잡곡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잡곡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해 좁쌀 기장 수수 따위를 골고루 재배해왔다. 하지만 방아 찧기는 어려웠다. 요즈음은 웬만한 방앗간에서는 잡곡을 취급하지 않는다. 잡곡 농사가 돈이 안 되니 기계도 덩달아 밀려난 셈이다. 그러니 방아 기계를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멀리까지 가야 했다. 이웃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겨 절구질을 해보았다. 껍질이 벗겨지며 나온 노란 알이 아주 예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무절구와 공이를 만들었다. 기장이나 수수는 잠깐만 찧으면 일주일 정도 먹을 양이 나왔다.
‘우리 식구 목숨이 이 손 안에 있구나!’
자신이 생기니 쌀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쌀이 갖는 상징성은 아주 크다. 돈도 돈이지만 석유 문명에 대한 위기감이 한 나라를 넘어 점점 높아가고 있다. 절구질로 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겠나. 적어도 소박한 삶에 대한 자기만족은 되리라고 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머리를 굴리며 비장한(?) 마음으로 절구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하지만 잡곡과 달리 쌀은 쉽지가 않았다. 한 시간 낑낑대며 얻은 쌀은 한 끼 분량이 채 안 되었다. 밥은 하루 세 끼 날마다 먹는 건데 앞이 아득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누구나 절구질로 쌀을 쓿어 밥을 먹었을 테니까. 절구질을 몸에 익히자면 동기 부여가 더 필요했다. 날마다 먹는 밥이 어렵다면 떡을 먼저 해보자. 그것도 떡메로 치는 찹쌀떡으로. 겨울 분위기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떡메를 근사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식구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절구질하는 손에 다시 힘이 붙었다. 밥솥에 찐 쌀을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며 떡메로 쳤다. 산골 겨울의 추위도 잊고 식구가 함께 ‘체험학습’을 했다. 떡이 다 되자, 마음은 급하지만 목구멍에 떡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손으로 모를 내고, 낫으로 베어, 홀태로 거두고, 절구로 방아를 찧어, 떡메로 친 떡.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나와 우리 식구 목숨이 바로 이 손 안에 있구나.’ 그 감격에 겨워 계속 연구했다. 절구와 공이를 내 몸에 맞게 개조했다. 공이 손잡이 곡면을 내 손바닥에 맞추고, 무게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나락껍질을 가장 잘 벗길 수 있는 정도로 맞추어 나갔다. 절구의 홈 역시 공이와 암수가 되어 위아래 전후좌우 회전 운동이 잘 되게 다듬었다. 그리고 기술적인 여러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절구질을 할 때 보통은 위아래로 찧는다. 그럼 쌀알이 잘 깨진다. 그래서 나는 공이를 절구에 문질러 껍질을 벗겨냈다. 한 되 정도 일차 껍질을 벗기면 바람에 껍질을 날린다. 옛날에 우리 형이랑 어머니랑 세 사람이 하던 디딜방아보다 효율이 더 좋게 느껴졌다. 디딜방아는 세 사람이 필요하고 쌀알도 훨씬 더 잘 깨지며, 키질을 해야 한다. 절구질 방아 역시 바람이 없으면 키질을 해야 한다. 그러나 키질은 내 몸에 익지 않았기에 제대로 안 된다. 그러니 바람에 민감해질 수밖에. 하루 가운데 바람이 언제 이는지. 계절에 따라 바람 방향은 어떠한지. 바람을 타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쌀이 안 나온다.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점차 몸 구석구석이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갈수록 기술이 늘고, 몸에 익어 하루 한 시간 정도면 이틀 먹을 양식을 찧게 되었다 |
‘절구질 도사’의 ‘광화 법칙’
그렇게 두 해를 절구질하다 보니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재미있겠다고 ‘체험’해 본 사람도 있었지만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며 따지거나 “바쁜 세상에 언제 그 짓을 하고 있느냐”고 비웃기도 했다. 그런 비판과 비난에 일일이 대꾸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내 모습에 내가 취했다. 때로는 ‘간디의 물레’가 이 땅에서 나를 통해 나무절구로 다시 살아나는 거라며 나르시시즘에 빠지곤 했다. 손으로는 절구질을 하면서 머리로는 깨달음을 얻고자 경전을 공부하고 명상을 했다. 노자 도덕경을 다시 보았고, 바가바드기타(힌두교 3대 경전 중 하나)는 아예 끼고 살았다. 한 구절을 읽고는 절구질하면서 그 내용을 되새김질하곤 했다. 깨달음에 목이 말랐기에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경전을 빨아들였다. 좀체 나와는 인연이 없던 성경도 보았다. 몇 구절 읽는데 예수가 내 앞에 살아 있는 듯 다가왔다. 그러면서 예수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집 뒤 산등성이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내 의식이 급속히 팽창하는 듯했다. 산 아래 세상을 굽어보며 명상에 젖었다.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던 경전인데 지금 내게 소중하게 다가온 이유가 뭘까. 이제는 세계가 하나로 통하니 경전도 하나로 통합되면 좋지 않겠나. 깨달음이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될 수는 없는가.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면 쌀에도 영혼이 있지 않을까. 내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마냥 막힘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그때 ‘절구질 도사’로서 깨달은 ‘도(道)’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공이로 나락을 문지르다 보면 껍질이 한꺼번에 다 벗겨지지 않고 미가 남는다. 절구통 안에 먼저 벗겨진 쌀알과 남은 미를 어떻게 분리할까. 고민하다가 바가지에 담고 흔들어보니, 껍질이 벗겨져 실한 쌀알은 아래로, 미는 위로 모이는 게 아닌가. 여기서도 물리 법칙이 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물리법칙만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 나락은 물질이면서 살아 있는 생명이다. 흙을 떠나서는 자기 생명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껍질이 쌀알을 감싸고 있을 때는 벌레나 추위에 잘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진 다음에는 그 생명은 오래가지 않는다. 벌레도 호시탐탐 노리고, 곰팡이도 좋아라 하고 달려든다. 그러니 껍질이 벗겨진 쌀알은 작은 흔들림에도 자기복제를 실현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건 살아 있는 씨앗의 ‘자기 떨림’이 아닐까? 흔들림에 반응하는 자기 떨림. 내 생각이 그럴 듯해 보였다. 내친김에 이름을 붙였다. 내 이름을 따 ‘광화 법칙’이라고. 나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라도 된 듯 뿌듯했다. 한술 더 떠, 이 법칙을 사람 사는 세상에 적용해보았다. 사람도 생명이니까. 금융위기와 같은 경제적 충격이나 세계를 뒤흔드는 정치적 충돌을 겪게 되면 사람은 새롭게 움직인다. 사람을 ‘흔드는’ 그 충격에 저마다 대응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신에 대한 성찰을 아무래도 많이 하게 되리라. ‘위’를 좇다 보면 만족할 수가 없다. 만족을 알고 자신에게 충실하자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경쟁보다 나눔을, 전쟁보다 평화를, 두려움보다 자유를 얻자면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하리라. 그런데 꼬박 두 해를 절구로 쌀을 쓿어 먹다 보니 아내가 힘들어했다. 이게 어떤 쌀인가! 쌀 한 톨, 잡곡 한 톨 허투루 버릴 수 없으니 긴장한다. 밥을 남길 엄두를 못 낸다. 손님이 와도 대접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당시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먹자면 누구든 절구질을 손수 해야만 했다.
정장 차림으로 김매러 가다
지금 돌아보니 절구질은 나 자신을 위한 ‘수행’이었다. 내 안에 깊숙이 남아 있던 돈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결국 내 ‘깨달음’은 나만의 치유일 뿐 아내에게는 또 다른 억압이 된 셈이다. 이웃에게는 ‘별난 놈’으로 거리감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먹어치우는 양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내 절구질 기술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깨달음을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우선 나부터 행복해야 했다. 돈 때문에 생긴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는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절구질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 손으로 다시 할 수 있으니 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앞으로 전기나 석유 없이 ‘살아야 하는’ 날이 행여 있더라도 이를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그러는 한편으로 소비 욕구도 달라졌다. 남과 견주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겉치레 소비는 점점 멀어졌다. 뭔가를 사고 싶은 갈증보다 내게 다가온 더 큰 문제는 방치된 살림살이였다. 가장 좋은 보기가 옷이다. 서울 살 때 입던 양복은 시골 와서는 입을 일이 없었다. 나들이옷은 개량한복 두 벌로 몇 년을 입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정리하는데 그때마다 양복이 짐이 되기만 했다. 그렇다고 남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 나중에는 옷장을 볼 때마다 양복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그 옷들을 마련한다고 주눅 들었던 지난날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고민하다가 농사지을 때 입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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