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는 삶으로 한걸음 더
내게 농사란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20년 전, 도시 삶을 버리고 시골 삶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도시 삶이란 대부분 이러저런 사람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꼭 자연이니 땅이니 하는 것들과 관계 맺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시골은 자연이 먼저다. 설사 비닐 집을 치고, 기름을 때어 작물을 키우더라도 땅을 필요로 한다. 흙이 없이도 재배가 가능한 양액재배 같은 경우는 굳이 시골일 필요가 없다.
어쨌든 흙을 딛고 살 경우, 사람 관계는 최소로 해도 된다. 자신을 치유하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만큼. 또한 시골은 자연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밤이 되면 깜깜해지니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 가끔은 환한 보름달빛이 아까워, 그 아래 허덕이며 일을 하기도 하지만, 아주 예외일 것이다. 그러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 흐름을 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낮과 밤을 따르고, 계절의 흐름을 탄다는 건 삶이 근본에 서 있음을 말해준다.
사람은 근본에 설 때 많을 걸 가진다. 땅에 발 딛고 살 때, 돈 벌기는 쉽지 않지만 그 대신에 돈 주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갖게 된다.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게 되며, 내가 잘 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모든 걸 잃어버리지 않는가! 땅에 발 딛고 산다는 건 어쩌면 삶의 출발선에 서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러면서 차츰 새로운 가치들에 눈을 뜨게 된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사랑’이니 ‘창조’니 하는 것들에 제법 익숙해지는 거 같다.
내가 작물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과 방치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또한 사랑으로 돌보는 지, 욕심으로 돌보는 지 그 차이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안다.
창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가치다. 내게 창조란 머릿속에 든 그림을 현실로 드러내는 걸 말한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일들이 다 창조다. 많은 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단 하나의 무언가를 이루어낸다.
창조에 익숙해지면 그 능력도 점점 자라는 거 같다. 생각이 창조가 되며, 언어도 창조가 된다. 내가 창조하여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부부연애’다. 보통 결혼을 하기 전, 연인이 서로 사귀는 걸 연애라고 말한다. 결혼하면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애는 끝난다고 본다.
하지만 꼭 그런 거 같지 않다.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데 시효가 있다고 믿으면 실제 있다. 그러나 없다고 믿고 그렇게 살면 없지 않을까. 서로 설렘을 간직하며 살자고 노력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 믿음을 지켜가고 키워가고 싶어서 내가 만든 말이 바로 ‘부부연애’다. 그래서 나는 내 명함에다가 농부니 작가니 하는 말 대신에 ‘부부연애 전도사’라고 밝힌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자신의 직함을 스스로 만들면 그 직함에 보다 더 충실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더 새롭게 뻗어가게 된다.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창조는 또 다른 빅뱅을 가져온다.
요즘 내가 새로 고민하는 직함이 하나 있다. 창조자(Creator). 이 직함에 대한 느낌이 계속 된다면 이번에는 종이 명함 대신에 모바일 명함을 만들 생각이다. 나 자신을 알리는 목적보다 사람들과 영감을 나누자는 게 주된 목적이니까.
창조자!
크리에이터!
가슴 설레는 직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