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노래 그림 중독, 삶의 예술

[스크랩] 3월 달력, 겨울 난 냉이

빛숨 2011. 3. 2. 06:02

 

어느 새 3월이다. 달력으로는 3월부터가 봄이지만 자연의 봄은 훨씬 이르다. 2월 초, 입춘 무렵이면 언 땅 거죽이 녹으면서 질척이고, 까치는 짝을 지어 집을 짓기 시작한다. 겨울 난 광대나물, 개망초, 냉이도 조금씩 일어설 준비를 한다.

 

봄비가 내리는 우수가 되면 봄은 그야말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겨우내 움츠렸던 암탉은 달걀을 슴쁙슴쁙 낳는다. 열대여섯 개쯤 낳으면 이제는 알을 품고 싶다고 ‘고오고오고’하며 애잔한 울음을 날린다.

 

겨우내 김치와 묵나물을 먹다가 밭에서 보게 되는 풀들. 저절로 끌린다. 그 가운데 냉이 한 뿌리 캐어보면 그 향기와 기운이 강렬하다. 냉이는 두 해살이 풀이다. 자연에서 자라는 봄 냉이란 그 전 해에 싹이 나서 겨울을 난 것들이다.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 향기는 또 얼마나 강렬한 지. 쉽게 잊을 수 없는 만남이다.

 

냉이를 여러 뿌리 캐다보니 머릿속에 3월 달력으로 그리고 싶은 밑그림이 떠올랐다. 간단히 스케치해서 탱이를 보여주었다.

“좋네요. 다만 냉이를 좀더 내리면 좋겠어요. 냉이 뿌리가 시작되는 지점이 달력 날짜와 만나게.”

 

자, 이제 그림 연습이다. 그림 솜씨가 아주 서투니 긴장부터 한다. 어느 냉이를 모델로 할까. 냉이 이파리를 보면 거의 비슷하지만 뿌리를 캐보면 냉이마다 확연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냉이를 찾아, 다섯 뿌리쯤 캤다. 뿌리가 잘 뻗고 골고루 뻗고 균형 있게 뻗은 걸 하나 골라 잘 씻었다. 그리고는 저녁에 그림을 그려야지 했는데 무슨 일 때문이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뿌리는 다 말라버렸고 잎은 시들었다.

 

다시 기회가 왔다. 2월 말쯤, 사흘 내리 비가 온다. 역시나 잘 생긴 냉이 한 뿌리 캐서 물로 씻었다. 이번에는 바로 그려야지. 문제는 다시 그림 실력이다. 데생도 제대로 못하니 진도가 나아가질 않는다. 뿌리를 다 그리기도 전에 뿌리가 말라가는 것 같다. 초조하다. 그렇다고 후딱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잎은 또 왜 그렇게 어려운 지. 자세히 보니 잎 가장자리 따라 뾰족한 곡선이 있다. 또 냉이는 로제트 식물이라 잎 끝에는 아직도 붉은 빛이 남아있는데 이 역시 그리기가 어렵다. 게다가 색연필로 그렸더니 색이 연하기만 할뿐 덧칠이 안 된다. 이래저래 끙끙.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로서는 전문가처럼 그릴 수는 없다. 그냥 이렇게 냉이를 한 번 자세히 본다는 것. 냉이를 달력에 그려본다는 것 자체에 뜻을 두기로 했다. 시행착오를 하고, 뒤죽박죽되는 과정들 모두가 그저 소중한 삶의 한 순간들이 아니겠나.

 

무엇보다 이 달에는 병아리가 깨어나는 달이다. 지금 둥지 두 곳에서 암탉이 알을 품고 있다. 한 둥우리는 일곱 알을 넣어주었는데, 3월 12일이 예정일이다. 또 한 배는 열 알을 넣었고, 17일이 예정일. 이 가운데 몇 마리가 병아리가 되어 나올까. 예정일 달력에 병아리 얼굴을 스케치하는 데 이 과정이 참 즐거웠다. 연습을 할 때마다 병아리 비슷하게 분위기가 닮아가는 게 좋았다.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갓 깨어난 그날이 바로 지금인 것처럼.

 

여기까지 그림을 어찌어찌 했는데 이 달에는 시도 어렵다. 시적 영감이 몇 갈래로 왔지만 도대체 완성이 되지를 않는다. 보름쯤 틈틈이 고치고 다듬고를 반복했지만 영 아니올시다. 뿌리에다가 초점을 맞추어도 아니고, 향기에 초점을 맞추어도 아니다. 달력 날짜는 다가오고, 달력의 여백은 크기만 했다.

 

3월 첫 날 새벽에 깨어나 내가 끙끙대자, 아내가 나선다.

“자꾸 다듬으려고만 하지 말고, 우선 하고 싶은 말을 해봐요.”

아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쌓였던 말을 토해냈다.

“그 말 그대로가 좋네요. 시랍시고 힘주지 말고, 지금 말하듯이 그렇게 그냥 편하게 써요.”

 

부부가 이불 속에서 함께 다듬은 시를 가지고 이번에는 아이들 감수를 받는다. 아침을 먹으면서 내 시를 찬찬히 불러주고 도움말을 들었다. 글 자 한 자를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부분에 대해 두 아이 의견이 같았다. 역시나 봄은 봄이다. 아이들 생각이 헷갈렸던 내 마음을 잡아주고 또 모아주니 말이다.


<겨울 난 냉이가>


달력 위에서 자랐다면

날짜 하나하나마다

뿌리를 내렸으리라.

출처 : 홈스쿨링 가정연대
글쓴이 : 아이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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