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홈스쿨러 사회성(3) 일머리 익히기
사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일을 하며 살아간다. 사회성을 이야기할 때 이 일을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 어쩌면 자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을 대하는 일머리가 사회성의 직접적인 잣대가 될 지도 모른다. 결론 하나를 미리 이야기하자면 ‘일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사회성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반면에 일을 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그 사회는 곧 병든 사회가 된다.
우선 일에 대한 정의부터 하고 넘어가자. 내가 말하고 싶은 일은 상품화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는 조금 다르다. 아이들에게 일은 생명을 가꾸는 모든 활동이 다 일이 된다. 아주 쉽게 보기를 들면 이부자리를 깔고 개고, 청소하고, 밥 짓고, 설거지하는 일들부터가 아주 소중한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바로 생명활동의 토대라고 해도 좋지 않는가. 아이들에게 이런 일들은 놀이가 되기도 하고, 배움이 되기도 하며, 성장과 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머리는 일하면서 자란다. 책상머리에서 아무리 근사하게 배웠어도 막상 일을 손에 잡으면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한다. 또한 책상머리에서 열 시간 끙끙대며 일을 익히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해보면 일머리는 부쩍 자란다. 자라면서 이렇게 몸을 움직여 일해 본 경험은 평생 소중한 자산이 된다.
지난 60~70년대 농촌에 자란 세대는 누구나 일을 하면서 자랐다. 이를 가장 잘 정리한 책이 아마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이지 싶다. 그러나 요즘 많은 아이들은 일을 거의 모르고 자란다. 학교와 학원이 삶의 주된 공간으로, 가정은 잠자고 옷 갈아입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심지어 학원을 뺑뺑이 돌다가 잠마저 집에서 제대로 못자는 모습을 고등학생들 시를 읽다보면 자주 보게 된다.
이제 나는 일을 근본에서 다시 짚어야할 때라 믿는다. 지난 60~70년대 <일하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아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일을 해야 했다. 부모가 절대 가난에 허덕이다보니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둔다.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을 잘 살려주는 게 아주 소중하다는 말이다. 교육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일의 성과보다 일머리를 키우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일머리는 즐겁게 일을 하면 즐거운 일머리가 생긴다. 억지로 일을 하면 꾀를 부리는 일머리나 되도록 일을 피하고 싶은 머리가 생긴다. 또 일을 하다보면 일머리는 제 스스로 자꾸 새롭게 해결하고자 번득이는 그 무엇으로 자란다. 한마디로 창조적인 일머리로 발전한다. 이런 일머리를 잘 살리면서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할 때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일머리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삶 속에서, 일상에서 조금씩 자란다. 점차 ‘나비효과’로 발전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나비효과로 나타난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안 해보고 자라다보면 나중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이 뭔지조차 모른다. 그저 돈이 많다거나 직장이 안정되거나 그런 것에만 홀려 본질을 놓친다. 점차 일을 피하게 되고 두려워하며 싫어진다. 더 심해지면 살아야할 이유조차 모르게 되고, 사회가 싫어진다. 사회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잃어버린다.
홈스쿨러들은 대부분 일을 꽤 하면서 자라는 편이다. 그 이유는 가까운 가족의 삶을 늘 지켜보며 자라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루 끼니를 집에서 다 해결하는 것부터 그렇지 않나.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우선 일은 아이들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른들이 하는 일을 아이들 눈으로 본다면 놀라움 그 자체다. 손으로 뚝딱뚝딱해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옷이 되고, 집이 지어진다. 당연히 아이들은 부모 일에 호기심을 갖고 형편껏 해 보고 싶어 한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성가시다거나 위험하다거나 ‘넌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내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제 수준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이 일을 하는 동기는 호기심만이 아니다. 어른이 되고자 하는 꿈도 거기에는 담겨있다. ‘네가 한다면 나도 하겠다.’는 동류의식 같은 거 말이다. 형제를 따라하든, 친구를 따라하든, 부모를 따라하든 많은 부분 모방하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일은 어른을 모방하고자 하는 몸놀림이다. 엄마가 요리를 하면 곁에서 하려하고, 아버지가 군불을 지피면 저도 불을 피우고 싶어 한다. 자랄 때부터 아이들이 갖는 이 마음을 흘려버리지 않을 때 일머리는 부쩍 자란다.
이런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
“나도 해 볼래.”
아이들이 일하는 세 번째 동기라면 자신도 식구의 한 사람이라는 자각이다. 식구는 그야말로 밥을 같이 먹는 사이다. 가정은 인간이 갖는 소속감을 만족시키는 원초적 공간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식구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도 식구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고 싶어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가족이란 공동체가 굴러가는 바탕 마음이 된다. 식구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힘들게 일하면 기꺼이 작은 손이라도 내밀어 돕고자 한다.
내가 일하면서 힘들어 보일 때면 우리 아이가 가끔 내 곁에 다가와 하던 말.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하다못해 저녁에 고사리 손으로 내 어깨라도 주무른다. 보살핌은 따뜻한 사회성을 이어가는 잣대다.
네 번째 동기는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의 하나다. 뭔가를 새롭게 아는 것도 자아실현의 과정이 되기는 하지만 자아실현의 느낌을 가장 강렬하게 주는 건 바로 일이다. 책상머리 배움은 뇌를 바꾸는 것에 불과하지만 몸을 움직여 아이들이 하는 일은 뇌뿐만 아니라 뼈와 근육과 호흡과 심장과 감정 그 모든 것들이 함께 해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 여기에다가 일은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니 자아실현을 순간마다 확인하게 된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강하게 느끼게 된다. 개별 가정 안에서만 일을 조금씩 하던 아이들이 점차 사회적인 일로도 손을 뻗친다. 지난 가을 내가 잘 아는 청소년 홈스쿨러 한 가정이 집을 짓고 있는 데, 이 집으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 잠깐이나마 집짓기를 거든 적이 있다. 집 주인처지에서 일의 성과만을 생각한다면 청소년 아이들이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일하고자 하는 아이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살려주는 것은 그 어떤 교육철학보다 위대하다. 이런 일들 말고도 청소년 홈스쿨러들이 국제적인 봉사활동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례도 많다. 내신성적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아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말이다.
다만 이런 과정은 아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할 때 이루어진다. 가족이 함께 하다 보면 부모가 아이에게 일을 시킬 때도 가끔 있다. 이럴 때는 매우 조심해야한다. 60-70년대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이라면 진저리 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뼈와 근육이 잘 자랄 만큼만 일을 해야 하는데 이를 벗어날 때 일은 고통이 된다. 이런 경험이 자주 쌓이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성장이 왜곡되고, 일을 외면하려 한다.
일머리는 통합적인 지식을 가져다준다. 부분적인 지식으로는 일을 일답게 해나기 어렵다. 일머리는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징검다리가 된다. 사회성도 자연스레 자란다. 어느 날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는 사회성을 근본에서 돌아보아야하지 않겠나. 졸업을 한 뒤 어느 직장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히끼코모리(은둔형외톨이)가 되기 쉽고, 이런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자연스럽게 자라는 아이들은 한 가정 안에 식구 한 사람으로서 자기 몫을 다 하고 싶어 하듯이, 자신이 자라는 만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도 기꺼이 자기 몫을 하고 싶어 한다. 자라면서 하고 싶은 일을 기꺼이 하면서 성장할 때 사회성도 자연스럽게 자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