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행복과 나비효과 (생활성서)
나는 도시에 살 때 지칠 대로 지쳐 몸과 마음이 크게 망가졌었다. 사회는 물론 가정에서조차 쓸모없는 ‘잉여인간’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다운 삶을 찾고 싶어 선택한 것이 귀농이었다. 도시를 떠나 흙에 뿌리내린 지 십여 년.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을 되찾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삶을 감사하고, 일상의 충만함을 적지 않게 누린다. 대부분의 탐욕이란 남과 경쟁하고, 남을 따라가려는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음은 자꾸 비만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진정한 다이어트’란 바로 자기중심을 가진, 나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원초적 행복을 되찾아
‘나다운 삶’이란 먼저 자신의 몸에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마음은 너무 변화무쌍하고 어렵다. 때로는 내 마음이 뭔지조차 헷갈릴 때도 많다. 하지만 몸은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정직하다. 또한 내 몸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고유하다.
진정 감사한 게 무엇인가. 행복의 바탕은 생명 그 자체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지. 이 말이 너무 막연하다면 좀더 구체화해보자. 산다는 건 그 기본이 먹고 자고 싸는 데 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건 고통이다. 배부른 데도 자꾸 먹고 싶은 건 마음의 허기 때문. 그러나 배고플 때 먹으면 맛도 좋지만 먹는 게 감사하고 행복하다. 자고 싸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먹고 자고 싸는 이 세 가지 행복은 타고난 행복이다. 이 행복을 제대로 누릴수록 나를 낳아준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도 절로 든다. 또한 이 행복은 대자연의 창조주가 주는 것이기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원초적 행복이다. 낮과 밤이 있고, 생명이 순환되는 자연에서 오는 행복이기에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더 나아가 이 세 가지 행복은 근본 행복이기에 또 다른 행복감을 늘려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설사 외부 조건으로 삶이 흔들리더라도, 원초적으로 행복하다면 쉽게 치유되지 않을까.
작은 움직임이 모여 거대한 태풍이 되듯이
우리는 일상이 주는 작은 행복을 무시하고 더 큰 꿈을 쫒아 허우적대기 쉽다. 그러다보면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혹시 불행하다면, 이미 이루어진 걸 감사하기보다 이루지 못한 꿈에 빠져 더 불행한 건 아닌가.
나비효과라는 게 있다. 처음 시작은 나비 날갯짓같이 아주 작은 움직임이지만 이게 다른 여러 움직임과 어울려 점차 그 힘이 태풍처럼 커진다는 과학이론이다. 이 효과를 행복에도 적용해 본다.
나비효과는 초기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움직임을 무시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초기조건’은 바로 원초적 행복이다. 엄마 젖을 빨며 행복하던 아기는 자라면서 이유식을 먹게 되고, 더 자라면 자기 손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해서 먹게 된다. 그 몸짓이 어른 기준에서 볼 때 서툴더라도 아이는 한사코 제 손으로 먹으려고 한다. 음식 이전에 손수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부터 아이는 행복하다. 그만큼 제 놈이 컸다는 거지.
더 자라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면 스스로 의식주를 마련하게 된다. 이 때는 또 다른 행복이 밀려온다. 당당하게 어른이 되는 행복이다. 이 행복은 하기에 따라 엄청난 확장을 갖는다. 사회적으로도 뻗어가지만 내면의 행복은 가꾸기에 따라 한없이 커질 수 있다.
연인을 만나고, 부부로 인연을 맺어, 가정을 꾸린다. 이 모두는 의무가 아니다. 행복을 위한 선택이자 하늘이 준 권리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 요즘 세상에 아이를 의무로 낳는 부모가 있을까. 낳고 키우는 게 더 행복하다고 믿기에 그렇게 한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한다면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의 내면도 성숙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행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그 토대는 늘 행복의 초기조건인 원초적 행복이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불행은 대부분 자고나면 잊어진다거나 마음을 바꾸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다.
원초적 행복에서 뻗어가는 행복들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하늘이 하는 일에 견주면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사람이 애써 지은 집과 도로가 지진한 방에 무너지고, 수백만 사람조차 전염병에 순식간에 희생되기도 한다. 이런 불행한 일은 그마나 눈에라도 잘 드러나니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자연의 근본은 온갖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일이다.
우리네 생명이 되는 곡식은 물론 과일도 다 그렇다. 보기로 감나무를 들어보자. 감나무에 감이 열리기까지 사람이 기울이는 노력은 어린 나무를 심고 돌보는 정도. 몇 해 지나 뿌리를 제대로 내리면 사람이 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저절로 자라 꽃이 피고 감이 달린다. 햇살과 비를 맞으며 점차 굵어져 노란빛으로 물들어간다.
감은 서리를 맞고도 그냥 내버려두면 붉은 홍시가 된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 맛. 그 어떤 요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은 바로 자연만이 줄 수 있는 맛이다. 햇살과 바람과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맛.
이렇게 변화무쌍한 생명의 신비를 자연이 알아서 다 한다. 여기서 사람은 다만 자연의 긴 흐름 중간에 잠시 개입할 뿐이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껍질을 깎고 말린다. 이 때 햇살도 소중하지만 바람이 고맙기 그지없다. 바람이 잘 통하는 데 걸어두면 시나브로 말라간다. 만일 사람에게 바람이 하는 일을 맡기면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햇살과 바람 말고도 자연이 주는 은혜는 훨씬 많다. 빛깔이 달라지고, 맛이 달라지는 것도 은혜다. 처음에 껍질을 깎으면 감은 연노란 빛이다. 그 속살의 황홀함이란! 차츰 말라가면서 빛깔도 맛도 달라진다. 점점 붉은 빛으로 바뀌면서 떪은 맛은 사라지고 단맛이 부쩍 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단 맛. 이 상태를 곶감 가운데서도 반건시라고 한다. 겉껍질은 조금 많이 말라 쫀득쫀득하고 속살은 부드러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이렇게 곶감이 되는 과정도 신비롭지만 감이 홍시를 거쳐 식초가 되는 과정 역시 경이롭다. 어디선가 아주 작은 초산균이 달라붙어 식초를 만들어내는 과정. 무수히 많은 미생물이 쉼없이 일을 해서 만들어낸다. 여기에 견주어 사람이 하는 일은 감을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초산발효가 끝나면 걸러서 잘 보관하는 게 전부다.
자, 이제 이 감으로 요리를 한다면 그 맛은 또 어떨까? 무를 채 썰고, 소금,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고, 여기에 홍시를 얹어먹는다. 여기에 자연식초까지 가미하면 금상첨화다. 이 요리를 아내는 무홍시채라 이름 지었다. 간단하면서 깊은 맛이 난다. 무는 무대로 홍시는 홍시대로 자연의 맛을 간직하기에 그 맛들이 서로 절묘하게 어울린다. 감식초로 하는 요리는 더 많다. 발효 음식이 주는 깊은 맛, 미생물과 함께 한 긴 세월이 녹아든 맛이다.
이렇게 아주 작은 감 하나에서조차 감사함과 충만함 그리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밥 한 그릇, 책 한 권, 기름 한 방울은 또 얼마나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가. 이런 일상의 작은 행복들은 서로서로 상승작용을 한다.
이 상승 작용에는 나눔도 들어간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많이 나누자는 건 아니다. 넉넉한 만큼 나눌 뿐이다. 대가를 바라는 않는 나눔이야말로 기쁜 나눔이 된다. 이렇게 자연이 주는 은혜를 느낄수록 나눌 수 있는 것도 늘어나지 않겠나. 물질만이 아니라, 삶이 기쁘고 감사하니 그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똥 기도
음식을 감사하고 또 기쁘게 먹으면 마음도 이를 닮아간다. 좋은 걸 잘 먹었기에 나쁜 마음, 삿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쩌다 독한 마음, 삿된 마음을 먹었다면 아무리 맛난 음식이 앞에 있어도 그리 당기지 않는다. 군침이 돌기는 고사하고 마른침조차 힘겹다. 삿된 마음에 휘둘리니 맛은 고사하고 눈앞에 음식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억지로 우겨 넣더라도 소화가 잘 될 리 없다.
똥을 싸는 것도 마찬가지. 잘 먹으면 잘 싸게 된다. 끈기도 적당하고 빛깔도 좋은 똥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유기농산물을 먹더라도 마음을 제대로 먹지 않고는 결코 좋은 똥을 눌 수가 없다. 긴장을 많이 한 날에는 똥이 단단하다. 빛깔도 진하다.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듯 보내면 똥이 묽거나 설사가 난다. 냄새도 고약하고, 뒤도 찜찜하다. 그러니 우리가 먹는 음식 못지않게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느냐도 중요하다. ‘마음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마음도 농산물처럼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독기를 줄인 저농약 마음, 자신과 이웃 그리고 환경을 두루 살리는 유기 마음, 이런 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유기 마음은 똥으로도 연결된다. 나를 살리고 내 몸에서 떠나가는 똥. 다시 누군가를 살려 또 다른 모습으로 나와 다시 기쁘게 만나길 기도한다. 이런 작은 기쁨들이 모여서 우리네 삶을 더 풍요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