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아이들은 자연이다

새롭게 만들어본 개념, ‘아이른’과 ‘어른아’

모두 빛 2008. 8. 25. 19:33

 

나는 개념 만들기를 좋아한다. 내 의식이 확장될 때면 기존에 있는 개념만으로는 좀 답답함을 느낀다. 적절한 개념을 만들면 이해를 도와주며 의식을 고양시키는 효과도 있다. 그동안 내가 만들었던 개념을 몇 가지 들자면 ‘내학교, 온몸역학, 남뻑, 광화법칙’들이다.

 

‘내학교’는 말 그대로 ‘배움의 주체인 자신이 주인인 학교. 자기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배우며, 또한 제대로 배웠다면 배운 걸 언제든 누군가에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그런 학교다. 진정한 학교는 바로 자신이 주인이 되는 학교이어야 한다’는 게 내학교의 요점이다. 이는 입시교육을 벗어나 생명교육으로 가는 뼈대가 된다. 예전에 <귀농통문>과 대안교육 잡지인 <민들레>에 몇 번 기고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온몸 역학’은 데이비드 홉킨스가 쓴 <의식혁명>이란 책을 보다가 받은 영감이다. 이 책에서 알게 된 개념으로 ‘운동 역학’이란 게 있다. 운동역학이란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에게는 근육이 강하게 반응을 하고, 부정적이거나 안 좋은 것들에게는 근육이 약하게 반응한다는 이론. 이 개념을 이해하는 즉시 내 의식이 확장되면서 떠올랐던 개념이 온몸역학이다.

 

내가 느끼기에 운동역학은 근육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우리 온몸도 같이 반응한다는 게 바로 온몸 역학이다. 좋은 것을 보면 근육뿐만이 아니라 눈도 반짝이고 코도 더 예민해진다. 안 좋은 것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거나 눈을 감거나 또는 외면한다. 병든 몸과 마음이 아니라면 눈도 코고 귀도 입도 근육도 마음도 다 솔직하게 반응하지 않겠나.

 

이렇게 새로운 개념을 갖고 있으면 여기서 뻗어가는 내용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다. ‘내학교’는 아이든 어른이든 스스로 원해서 뭔가를 하고자 할 때 드러나는 열정과 에너지를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온몸 역학은 뭔가 결정을 내리거나 판단을 할 때 온몸을 열어둠으로써 후회하지 않게 된다.


<‘아이른’, 어른다운 아이>

 

이번에 새로 만들고 싶은 개념은 ‘어른 안의 아이, 아이 안의 어른’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상상이가 얼마 전에 내게 해준 말이었다.

 

“현빈이를 보면요. 나랑 놀 때는 내가 형이라서 그런지 어른스러워요. 그런데 동생들과 놀 때는 완전히 애가 되거든요.”

 

가만히 보면 어디 현빈이만 그런가. 이 말을 들려준 상상이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다. 나 역시 상상이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아이들을 볼 때면 무의식에 가깝게 아이 눈으로 아이를 대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성향을 갖고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이 뻗어가다가 칼 융이 처음으로 썼던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아니마는 남성안의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안의 남성성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융은 남성은 아니마를, 여성은 아니무스를 잘 살려서 전체 인격을 실현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상을 어른과 아이에게 적용해도 좋지 않을까. 아이 안에는 어른을 내면화하는 무의식이 있다. 어른이 되고 싶고, 어른을 흉내 내며, 어른을 자기도 모르게 깊숙이 내면화한다. 아이들과 솔직하게 수다를 떨다 보면 어른스러움을 곧잘 발견한다. 의젓함, 당당함, 독립심. 아니, 어떤 때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다. 영적인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탱이가 서울 살다가 처음 산골로 왔을 때 친구가 적기에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아이가 쉽게 대답을 해준 적이 있다. 당시 탱이는 초등학교 이학년 나이.

“나는 살아있는 건 다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참 근사한 말이었고, 산골에서 아이 키우는 데에 크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아이가 그런 것처럼 어른 역시 여전히 아이다운 본성을 갖고 있다. 어른은 누구나 아이를 거쳐 어른이 된다. 비록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속에는 아이다운 마음도 늘 함께 있을 수밖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른 누구나 부드러움, 호기심, 열림, 맑음, 솔직함, 두려움, 경외감들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었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어른 안의 아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드러나는 것 같다.

 

서울 살 때 나는 어린이 문학가였던 이오덕 선생을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만날 때마다 신기했던 건 선생이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다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모임이 있는 날, 누군가가 간식이라도 하나 챙겨오면 이것저것 호기심을 갖고 물어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쉰 나이가 넘는 이제 조금씩 아이다운 호기심을 되찾고 있다. 일상에서 생명을 돌보고 가꾸다 보니 잊었던 호기심이 하나둘 살아난다.

 

자, 이제 본론. 그렇다면 ‘아이 안에 어른’을 뭐라고 할까? 이런저런 개념을 만들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로 떠오른 게 ‘아이 어른’에서 ‘어’ 자를 뺀 ‘아이른’. 부르기 좋고 얼핏 아이가 막 성장한다는 느낌도 받는다.  

 

아이를 그냥 아이라고 볼 때 우리 어른들은 ‘아이니까 어리다’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어리다는 건 덜 자랐다 또는 미숙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다 보면 아이의 고유한 인격을 놓치기 쉽다. 아이들은 설사 자신이 어리더라도 아이 이전에 고유한 인격으로 존중받는 걸 좋아한다. 아이 인격을 존중할수록 어른 역시 아이한테 존중받을 수 있지 않겠나. ‘아이른’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하는 무의식이다.

 

<‘어른아’, 아이다운 어른>

그렇다면 ‘어른 안에 아이’는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이것 역시 ‘어른아이’에서 ‘어른아’로 불러본다. 어른이 자기 안에 아이를 잘 드러낸다면 어떨까. 어른은 아이들보다 한결 ‘가면’을 많이 쓴다. 싫은 걸 좋다고 말할 때도 있고 그 반대도 가끔은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다움은 깊숙이 잠재되거나 억압되곤 한다.

 

어른으로 살아가다가 가끔 던지는 질문들. 행복이나 생명 또는 영혼에 대한 물음들은 ‘어른아’ 어느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거라 나는 믿는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다움을 감출 필요가 없으리라. 오히려 자기안의 순수한 본성을 솔직히 드러낼수록 아이들과 소통하기도 쉬운 거 같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은 자라면서 충분히 아이답게 자라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가부장적인 문화와 빨리 철들고 어른되기를 강요하는 교육 풍토에서는 아이가 고유한 인격으로 자라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성장과정을 거쳤던 어른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도 어른아를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아이다운 어른’. 솔직하고 부드러우며 열러있는 어른. 자기 마음속의 아이를 잘 살려가는 어른. 어른이 ‘어른아!’라는 개념을 일상에서 갖고 있다면 한결 자기 본성을 되찾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이들 역시 어른에게서 아이다움을 발견한다면 어른을 어려워하지 않고 친근하게 부를 것이다. ‘아저씨나 아줌마’ 대신 친구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말, ‘어른아’. 아이들과 진정으로 소통을 원하는 어른이라면 ‘어른아’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의식화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른’과 ‘어른아’. 새롭게 말을 만들어서인지 아직은 어색하다. 그래도 자꾸 쓰다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아이른과 어른아가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면서 자기 안에서 조화롭게 통합되어간다면 세상은 한결 더 밝아지지 않을까? 아이는 좀더 독립된 인격으로, 어른은 좀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이른과 어른아. 너무 거창한 개념인가? 공감하는 ‘어른아’가 있다면 댓글을 기대한다.